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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Nov 28. 2021

<21>‘최초의 현대인’에게
마음을 묻다

종교는 자유를 통해 마음의 안식처 제공. 서로 사랑해야 편안해진다

“나는 마음에 울려오는 그대로 들었노라. 의심할 여지가 조금도 없었노라. 차라리 내가 살고 있음을 의심할지언정 진리가 아니었다고는 의심할 수 없으리라. 창조된 모든 것을 통해 지성 앞에 보이는 그 진리를.”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는 1600년 전, 로마제국 말기에 살았던 기독교 철학자다. 중세를 거쳐 근현대 철학에 큰 영향을 끼친 위대한 사상가다. 중세 학자들에게는 최고의 스승으로 불렸다. 


영국 신학자 헨리 채드윅은 “고대인들 중에서 아우구스티누스만큼 인간의 감정을 반추해 보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없었다”라고 평했다. 채드윅은 그를 ‘최초의 현대인’이라 이름 붙였다. 현대인들이 관심을 갖는 인간의 감정, 교육, 행복 추구 등을 그 당시에 이미 학문적으로 완벽하게 체계화했기 때문이다.


그가 남긴 걸작 고백록, 신국론, 삼위일체론 등은 후세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46세 때 쓴 고백록은 자신의 죄를 솔직 담백하게, 아주 구체적으로 털어놓고 신에게 나아가는 과정을 그린 책이다. 글 솜씨가 대단해 지금 읽어도 문장이 얼마나 아름답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위에 소개한 글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오랫동안 방황하다, 결국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기독교 신앙을 마음속 깊이 영접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그는 존경받는 주교, 위대한 사상가로 살다 갔지만 소년기와 청년기는 스스로 고백했듯이 ‘죄 지음의 방황기’였다. 우리네 보통 사람들처럼 사소한 욕망에 사로잡히고, 크고 작은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이었다.


몇 가지만 소개해 본다. 처음 학교에 들어갔을 때 교육 방침을 따르지 않는 문제아로 찍혀 하고 한날 매를 맞고 다녔다. 동네에서는 골목대장 노릇을 하며 사고를 쳐 부모가 친구들을 떼어놓으려고 다른 지방으로 학교를 옮겨야 했다.


열여섯 살 때는 불량 친구들과 어울려 배 도둑질을 했다. 그냥 몇 개 따먹는 게 아니라 한 짐을 훔치고 나왔다. 문제는 보통의 서리처럼 먹거나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악행을 저지르고 싶어서 훔쳤다는 사실이다. 고백록에서 그는 “도둑질 자체, 그 죄악이 좋아서였다.”라고 말했다.


유학 시절에는 육체적인 욕정에 깊이 빠져들었으며, 결국 신분 낮은 여인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기도 했다. 그의 가장 큰 방황은 그 당시 치명적 이단으로 간주되던 마니교에 깊숙이 빠졌다는 점이다. 무려 9년 동안 헤어나지 못해 어머니가 슬픔 속에 지내야 했다.


그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은 꽤나 길었다. 고백록에서 그가 밝힌 괴로운 심경을 몇 대목만 소개해본다.

나는 이미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 가진 바 모든 것을 팔아서 이를 사들여야 했건만 아직도 망설이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옛 마음과 새 마음, 육체적 정신적인 두 가지 의지가 내 안에서 저희끼리 싸움질을 하고 서로 대립하여 내 영혼을 찢어놓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게 뭐냐? 무식꾼들이 불쑥 일어나서 하늘을 쟁취하는데, 그래 우린 학식을 가지고도 마음 하나가 없어서 이렇게 피와 살 속에 뒹굴고 있구나!  앞서 간 자들을 따라가기가 부끄러워서냐? 따라라도 안 간 것이 부끄럽지 않단 말이냐? “


오랜 방황 끝에 결국 그는 회심했다. 그의 기쁜 고백이다. 


당신 교회에서 아름답게 울려 나오는 송가와 찬미가에 몹시 감격하여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 소리와 소리는 내 귀에 스며들고, 진리는 내 마음 안 속속들이 배어 경건의 정이 타오르며, 눈물이 쏟아져 흐르며, 이와 더불어 나는 행복했던 것입니다.” 


그렇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종교는 분명 행복이었다. 회심을 계기로 학문에 정진해 불세출의 명작을 저술하는가 하면, 유럽 문화의 중심축인 기독교계에 크나큰 족적을 남겼다. 76세까지 살며 복락을 누렸다. 당시로선 상당히 장수한 것이다.


세상에는 종교를 가진 사람도 있고, 갖지 않은 사람도 있다. 가진 이유가 여럿이듯 갖지 않은 이유도 여럿일 것이기에 서로 잘났다고 우길 일은 아니다. 나름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문제이자 살아가는 철학의 문제이기에 당연히 서로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세상에 종교가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 작지 않다. 세계인의 대략적인 종교 분포를 살펴보면 기독교 23억 명(천주교 13억 명, 개신교 10억 명), 이슬람교 18억 명, 힌두교 11억 명, 불교 5억 명 정도다. 종교가 없는 사람은 12억 명가량 된다. 종교를 가진 사람이 무려 83%에 달한다.


종교에 따라 믿음이 미약한 사람이 적지 않겠지만, 어쨌든 종교가 아예 없는 사람은 17%에 불과하다. 세계인의 대다수는 종교, 즉 믿음을 가지면 마음의 안식을 얻어 행복을 키우거나 유지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듯하다.


사실 누구나 행복해지려면 기본적으로 마음이 편해야 한다. 불편한 마음을 조장하거나 표현하는 단어를 떠올려보자. 실패, 실수, 질병, 장애, 가난, 도박, 이별, 고난, 방황, 슬픔, 걱정, 시기 질투, 화, 후회, 자살심리, 두려움 등이다. 나는 현실에서의 이런 고통스러운 상태, 혹은 고달픈 심리 상태를 가장 손쉽게 위로, 격려해줄 수 있는 수단이 종교 아닐까 하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갖고 있다.


종교는 정신적 구속을 받아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자유를 제공해 준다. 사람은 정신적으로 자유로울 때 비로소 행복해진다고 보면 종교 생활이야말로 행복의 지름길 아닐까 싶다. 따지고 보면 종교의 종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모든 종교는 구원이나 깨달음 같은 궁극적 관심을 유발하고 추구한다.


유일 신앙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보자. 이 세 종교는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다. 그들이 믿는 신은 이름만 각기 야훼, 갓, 알라로 달리 부를 뿐 꼭 같은 존재이다. 기독교 안에서 믿음과 신앙생활의 강조점 차이로 갈라진 천주교, 개신교, 정교는 사실상 같은 종교나 마찬가지다. 


동양 종교인 힌두교와 불교는 또 어떤가. 가르침이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불교 신자는 자신의 깊은 깨달음이나 해탈을 통해 영생불멸을 보장받고자 한다. 신의 개념이 없어도 훌륭한 종교로 인정받는 이유다.


이렇게 보면 서양 유일 신앙과 동양 종교를 굳이 대립적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인간의 궁극적 관심에 대해 거의 유사한 해답을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방식이나 수단이 다를 뿐 궁극적 관심에 접근하는 최종 목표, 즉 종착지는 거의 같다고 볼 수도 있다. 서양 종교가 동양에, 동양 종교가 서양에 제법 빠른 속도로 파급되고 있음은 이런 연유 아닐까 싶다. 특히 불교의 명상 기도법이 서유럽과 미국에 널리 보급되고 있음은 눈여겨볼 일이다.


종교 지도자들이 들으면 말도 안 된다고 하겠지만, 이 세상 종교가 결국 하나일 수도 있다는 의견에 나는 비교적 동의한다. 종교 연구가 홍익희가 저서 ‘문명으로 읽는 종교 이야기’에서 서술한 내용이다.


사실 각 종교가 원하는 세상의 모습은 같다. 이들 경전의 공통된 키워드를 모아 보면 정의, 평등, 사랑, 자비, 돌봄, 경외, 겸손 등으로 집약된다. 이는 다른 이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다. 이는 공감능력의 확대로 이어지며, 자아와 객체의 합일로 나타난다. 동서양의 종교가 바라보는 지향점은 같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종교는 사실 하나이다.”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는가.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란 왜 존재하는가. 종교는 어떠해야 하는가, 종교를 꼭 가져야 하는가, 어떤 종교를 가져야 하는가, 다른 종교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이 한꺼번에 이뤄질 수 있다는 느낌이다.


개인 차원의 고민과 처신을 넘어 사회 공동체의 사랑과 안녕, 그리고 평화를 위해서도 이런 시각은 더없이 좋아 보인다. 역사적으로, 아니 현 국제 정세에서도 종교 간 분쟁은 사랑과 평화를 좀 먹는 죄악에 다름 아니다. 교회일치 운동이나 종교화합 운동 같은 것은 종교 지도자들한테 맡기자.


보통의 우리 신앙인들은 남의 종교 함부로 폄하하지 말고, 이웃 삼아 서로 사랑하는 마음 길렀으면 좋겠다. 모든 종교의 제1 계명은 사랑 아닐까 해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지금 살아나서 강론을 한다면 아마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라’를 주제로 삼을 것 같다.

 

인용하거나 참고한 문헌

<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 최민순 옮김, 바오로딸, 2021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삶의 길을 묻다> 박승찬, 가톨릭출판사, 2017

<종교> 게르하르트 슈타군, 장혜경 옮김, 이화북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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