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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Jan 19. 2023

<5> 14세 연상 연인한테서 시를 깨치다

-릴케가 루 살로메와 함께한 러시아 여행

“내 눈빛을 꺼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아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내 팔을 부러뜨려주소서, 나는 손으로 하듯/ 내 가슴으로 당신을 끌어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심장을 막아주소서, 그러면 나의 뇌가 고동칠 것입니다/ 내 뇌에 불을 지르면, 나는 당신을/ 피에 실어 나르겠습니다.”


‘시인의 대명사’ ‘장미의 시인’이라 불리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를 설명할 때 14세 연상의 연인 루 살로메를 빼놓을 수 없다. 그를 불멸의 시인으로 만든 사람은 누가 뭐래도 살로메다.


두 사람은 1897년 5월 12일, 독일 뮌헨의 소설가 야콥 바스만의 집에서 열린 다과회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당시 릴케는 습작 수준의 시를 쓰는 22세 대학생이었고, 살로메는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러시아 출신 중년 작가였다. 릴케에게 살로메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포근하면서도 따뜻한 모성의 여인으로 다가왔다. 자유분방하면서도 당당하기까지 한 그녀는 젊은 열정에 불타는 릴케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고 말았다.


살로메는 점차 릴케의 정신적 후원자로 자리매김했다. 문학 평론가이기도 한 그녀는 릴케의 시작(詩作)에 직접 도움을 주는가 하면, 러시아 문학을 소개하고 철학자 니체의 사상을 전해주는 선생 역할을 했다. 릴케는 그녀의 제안으로 어머니가 세례명으로 지어준 자신의 이름 ‘르네’를 ‘라이너’로 바꾸기까지 한다. 


릴케가 어수룩한 대학생 티를 벗고 전도양양한 시인으로 성장한 것은 살로메와 함께한 두 차례 러시아 여행 덕분이다. 그는 유부녀인 살로메를 사랑하게 되면서 러시아 문학을 깊이 공부하는가 하면 여행을 위해 틈틈이 러시아어를 익혔다.


첫 번째 여행은 1899년 4~6월 릴케와 살로메, 그리고 그녀의 남편이 함께했으며 모스크바를 거쳐 그녀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주로 머무르는 일정이었다. 살로메의 주선으로 레프 톨스토이를 만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릴케는 여행을 다녀온 뒤 ‘기도시집’(1905년 출판)의 제1권에 해당하는 ‘승려생활의 기도서’를 집필했다. 


이와 달리 두 번째 여행은 살로메와 단 둘이서 1900년 5~7월 러시아 구석구석을 둘러보는 일정이었다. 우선 모스크바에서 크렘린궁과 여러 박물관을 집중적으로 살펴본 뒤 남쪽 도시 툴라에 들렀다가 톨스토이를 다시 방문했다. 교회와 수도원이 많은 키이우를 여행한 데 이어 오랜 시간 기차를 타고 러시아인들에게 마음의 고향인 볼가강으로 갔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일주일 동안 유람선을 타는가 하면 어느 농민 시인의 집에 머물며 생전 처음으로 농촌 체험을 했다. 짚으로 만든 매트리스에서 잠을 자고 말 젖을 마시기도 했다. 이후 모스크바로 돌아왔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여행을 마무리했다. 여행 후 릴케는 기도시집의 제2권에 해당하는 ‘순례의 기도서’를 집필했다.


첫머리에 소개한 릴케의 시는 이 무렵에 쓴 작품으로, 살로메를 향해 절절한 사랑을 고백하는 내용이다. 눈과 귀, 발, 입, 팔이 없어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수많은 사랑 시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작품이다. 그러나 두 번째 러시아 여행을 다녀온 뒤 릴케는 결혼을 하고, 살로메는 그에게 일정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릴케가 1926년 죽을 때까지 두 사람의 우정은 지속되었다.


릴케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장교로서 입신출세를 꿈꾸었지만 실패했으며 어머니는 허영심이 강해 부부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다. 8세 때 부모가 이혼한 뒤 어머니와 함께 살았지만 늘 불안하고 허전했다. 아버지의 뜻을 좇아 육군 군사학교에 들어갔으나 병약한 데다 적성에도 맞지 않아 중퇴했다.


방황하던 릴케는 20세 때 프라하대학 문학부에 들어가 예술사와 문학사를 공부했으며, 이듬해 뮌헨대학으로 적을 옮겼다. 이후 릴케는 평생 방랑하는 인생을 살았다. 그가 다녀간 나라는 12개국이며 거처로 삼았던 곳은 100군데가 넘는다. 고향 프라하를 떠나 뮌헨에 온 것이 첫 방랑이라면, 그곳에서 살로메를 만난 것은 두 번째 방랑의 시작이라고 해야겠다.


살로메도 방랑 작가이긴 마찬가지다. 1861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당시 여성을 받아주는 몇 안 되는 대학 중 하나인 스위스 취리히 대학을 다녔다. 타고난 미모에 지적 편력이 더해져 평범한 여자가 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병을 얻어 로마에 살 때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를 만나 그에게서 청혼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대신 그녀는 니체의 친구 파울 레에와 약 5년 동안 독일 베를린에서 동거하며 사회학자, 작가 등 여러 부류의 지식인들과 교류했다.


이후 레에를 떠나 언어학자인 카알 안드레아스와 결혼했다. 특이하게도 그녀는 성생활 하지 않는 것을 결혼의 조건으로 내세워 이를 실천했다. 릴케를 만난 것은 이 무렵이다. 릴케와 제대로 사랑을 나눈 것은 불과 4년이다. 살로메는 1912년 독일 바이마르에서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만나 76세로 죽을 때까지 우정을 나누기도 했다.


아무튼 살로메와 함께 러시아 여행을 다녀온 릴케의 시 세계는 눈에 띄게 확장됐다. 그에게 첫 명성을 안겨준 ‘기도시집’의 배경이 러시아라는 사실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러시아의 원시적인 자연과 인간 영혼의 힘을 직접 체험했기에 이런 수준의 시가 탄생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릴케에게 러시아는 내면세계의 원초적, 종교적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곳이었다. 독일문학자 신혜양은 학술 논문에서 릴케와 살로메의 러시아 여행을 이렇게 평가했다.


“두 사람의 여행은 러시아의 전통문화와 종교에 이끌린 일종의 순례와도 같은 것이었다. 두 작가는 러시아의 원시적인 자연 속에서 인간 영혼의 근원에 가 닿는 신비한 영적 체험을 했다. 그것은 자아의 재발견이었으며 고향으로의 귀환을 의미한다. (중략) 러시아 여행은 일회적인 여행이나 한 편의 여행기로 끝나지 않고 그들의 글쓰기에 지속적인 원동력을 제공하는 원형적 체험이며 인간의 내면과 신성에 대한 깊은 탐구활동이자 잊지 못할 삶의 기억으로 남는다.”


릴케는 옮겨가는 곳마다 새로운 시집을 탄생시켰다. 러시아 여행을 계기로 ‘기도시집’을 출간한 데 이어, 독일 예술가촌인 보릅스베데에서 신혼생활을 하면서는 ‘보릅스베데에서 그리고 그 후’와 ‘형상시집’을 펴냈다. 또 파리에서 화가 로뎅의 비서로 일하고 나서 ‘신시집’을 발표했고 이탈리아의 아드리아해 연안 두이노 성과 스위스 뮈조 성에 살면서는 ‘두이노의 비가’와 ‘오르페우에게 바치는 소네트’를 생산했다.   


방랑시인 릴케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은 뮈조 성이다. 죽음의 원인은 분명하지 않다. 뮈조 성으로 찾아온 이집트 출신 여자 친구를 위해 장미꽃을 꺾다가 가시에 찔린 것이 원인이 되어 패혈증으로 고생하다 죽었다는 설이 있다. 그보다는 백혈병을 앓고 있었지만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릴케는 뮈조 성 인근 지역인 라론의 언덕 위 작은 교회 옆에 묻혔다. 이곳에는 세상을 뜨기 1년 전 자신이 직접 쓴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겹겹이 싸인 눈꺼풀 속/ 누구의 잠도 아닌 기쁨이여.”


인용하거나 참고한 책

<릴케의 시적 방랑과 유럽 여행> 김재혁,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2019

<라이너 마리아 릴케> 박홍규, 푸른들녘, 2017

<정현종 시인의 사유 깃든 릴케 시 여행> 정현종, 문학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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