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 죄는 아니지만 돈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허영
*가난은 결코 매력적인 것도 아니고 교훈적인 것도 아니다.(찰리 채플린)
*가난은 행복의 큰 적이다. 당신이 불행한 부자라 해도 가난한 것보다는 행복하다. 돈이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은 허영이다.(알베르 카뮈)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에게 고상한 정신이 깃들기는 어렵다.(공자)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지만 안주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페리클레스)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당신의 죄가 아니지만 가난하게 죽는 것은 당신의 죄다.(빌 게이츠)
우리나라 현대 인물 중에 ‘가난’ 하면 이재명 경기지사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는 경상도 산골의 화전민 아들로 태어나 소년 노동자 생활을 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고등학교 과정을 밟아야 할 시기 약 5년 6개월 동안 공장에서 막노동을 해야 했다. 야구 글러브 생산 공장에서 일하다 프레스에 왼쪽 팔뚝이 말려들어가는 사고를 당해 장애인 6급 판정을 받았다.
그는 어느 방송에 출연해 이런 말을 했다. “남들 학교 갈 때 나는 회색 작업복을 입고 교복 입은 학생들을 피해 반대 방향 공장으로 출근했지요. 그때 교복 입은 아이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아마 가난에 한이 맺혔을 것이다. 그는 ‘공부만이 살길’이라 생각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진학했으며 죽도록 공부한 결과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다 성남시장을 거쳐 경기지사에 당선되었다. 유력 대선후보 반열에까지 올라있다. 지금은 그에게 가난이 아련한 추억일 것이다.
가난을 칭송하는 사람을 간혹 만난다. 가난해도 몸과 마음이 별로 불편하지 않으며, 돈이 많으면 오히려 불행하다고 말한다. 명심보감 구절을 들이대기도 한다. “천 칸의 큰 집도 잠자는 자리는 여덟 자뿐이고, 좋은 밭이 만 이랑이 되어도 하루에 먹는 것은 곡식 두 되뿐이다.”
가난을 경험해 보지도 않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밉상이다. 가난한 사람이나 가난을 겪어본 사람 입에선 이런 말이 좀체 나오지 않는다. 당장 의식주 해결이 걱정이고 인간다운 삶이 위협받는다면 부는 부러움의 대상일 뿐이다. “돈이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은 허영”이라는 카뮈의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통상적인 가난과 가난을 자청하는 청빈은 구분되어야 한다. 청빈의 대명사 법정스님은 평생 무소유를 말하고 실천했다. 스스로 자연을 즐기며 산골 오두막에 살며 행복을 추구했다. 아마 그의 청빈낙도는 성직자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성직자가 아니라도 봉사와 기부를 실천하며 청빈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 더러 있긴 하다.
가난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고통이고 불행이다. 가난은 비참하고 잔혹한 삶을 몰고 올 수 있다. 가족, 사랑, 우정, 건강, 심지어 생명까지 앗아 갈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최소한의 의식주 해결이 안 되는 절대적 빈곤은 거의 사라졌지만 상대적 빈곤을 느끼는 사람은 적지 않다.
가난은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칭송하거나 자랑할 일은 아니다. 가난하면 완전하고도 성공적인 인생을 가꾸기 힘든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싶어도 돈이 없으면 어렵다. 가난은 대물림될 가능성이 많기에 자녀 행복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그런 점에서 보통 수준의 경제력은 갖는 게 좋을 것 같다. 공자 말처럼 고상한 정신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불행하지 않을까 싶다.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으면 부모형제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 짐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누구나 가난을 극복하고자 힘써 노력해야 한다. 문제는 가난한 사람 중에는 가난을 극복할 의지가 없거나 게으르고 불성실한 이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열등감으로 과시적 과소비를 해 손가락질받는 사람도 흔하게 볼 수 있다.
페리클레스는 이런 사람들을 따끔하게 질책한다.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지만 안주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