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법. 절망하지 않으면 결코 죽지 않는다
*삶에서 절망을 경험하지 않고는 삶을 사랑할 수 없다.(알베르 카뮈)
*절망스러운 상황은 없다. 절망한 사람만 있을 따름이다.(클레어 루스)
*절망과 함께 진정한 낙관주의가 시작된다.(장 폴 샤르트르)
*희망은 삶 속에 존재하는 가장 위대한 힘이며, 죽음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다.(유진 오닐)
*희망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만질 수 없는 것을 느끼며, 불가능한 것을 성취한다.(헬렌 캘러)
절망은 죽음이지만 희망은 삶이다. 그러므로 절망하지 않으면 결코 죽지 않는다. “바다에서 조난돼 표류하는 사람이 평균 3일 정도밖에 살지 못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절망감 때문이다." 프랑스 의사 알랭 봉바르의 말이다.
봉바르는 바다 위를 표류하더라도 먹고 마실 것을 충분히 구할 수 있기에 삶의 희망만 잃지 않는다면 3일이 아니라 장기간 생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바닷물에는 수많은 생명체가 살고 있고, 식수는 바닷물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는 근거였다.
그는 1953년 가을 스스로 실험 대상이 되어 4.6 ×1.9m짜리 고무보트에 사각형 돛을 단 ‘레레티크'호를 타고 대서양 횡단에 도전했다. 먹을 것 하나 없이 카나리아 제도 라스팔마스를 출발한 봉 바르는 65일 동안 무려 4500㎞를 표류한 끝에 서인도제도 바베이도스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살 수 있다는 자신감, 희망이 어떤 악조건도 극복할 수 있음을 전 세계인에게 보여준 셈이다.
그렇다. 우리네 인생에서 희망이란 단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희망이 없으면 삶의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절망적인 상태는 삶에 대한 모든 기대가 사라져 체념과 포기의 터널을 지나가는 것을 말한다. 앉으나 서나 한숨만 나오고 앞이 캄캄하다.
무서운 것은 절망적인 상황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점이다. 비슷한 패턴으로 기승전결을 반복하면 온 몸에 힘이 빠지면서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 거리기도 한다. 카뮈는 “절망을 경험하지 않고는 삶을 사랑할 수 없다”라고 말하지만 한가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인류 문명이 최고도로 발전했는데도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사람이 수없이 많으니 불가사의한 일이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앵거스 디턴 프린스턴대 교수는 미국 사회에 ‘절망사(Deaths of despair)’가 급격히 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절망사란 자살,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으로 죽는 것을 지칭하는데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 18년 동안 사망한 미국인보다 절망사로 목숨을 잃은 미국인이 더 많을 정도로 심각하다는 지적이다.
절망스러운 상황은 그것이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는 점이다. 언제 닥칠지도 모른다. 오직 나에게만 닥친 불행이라며 신세 한탄하며 자포자기할 일이 아니다.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란 말이 있지 않은가. 절망과 희망은 머리를 맞대고 있다. 절망은 희망 연습이다. 그래서 절망은 단지 희망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알베르 카뮈는 소설 ‘페스트’에서 중세 흑사병의 절망적인 상황을 전하면서도 인간이 그런 재앙을 이해하며 다시 손잡고 극복하는 모습을 그렸다. 존 스타인백의 소설 ‘분노의 포도’ 역시 대공황이란 절망적인 상황에 맞닥뜨린 인간의 강인한 정신력을 묘사한다. 역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 법이다.
영국 상담심리치료협회(BACP) 소속 심리 상담사 라키 찬드의 조언을 들어보자. 그는 절망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다음 다섯 가지를 제안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많이 하라, 자책하지 말라, 현재에 집중하라, SNS에서 잠시 벗어나라,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라.
결국 자기 자신이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고 희망의 양식을 쌓아가는 수밖에 없다. “한겨울에도 움트는 봄이 있는가 하면, 밤의 장막 뒤에는 미소 짓는 새벽이 있다.” 칼린 지브란의 희망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