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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Jul 28. 2023

<7> 삶이 충만해야 죽음이 두렵지 않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이어령(초대 문화부 장관)의 좌우명


고대 로마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해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 소리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외치도록 했다. 라틴어로 “그대 역시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의미다. 오늘은 인기 절정의 개선장군이지만 언젠가 죽을 것이므로 너무 우쭐대지 말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한때 우리 시대 최고의 지성이라 불렸던 이어령(1934~2022)은 이 문구를 좋아해 좌우명으로 삼았다. 자신의 탄탄대로 인생길에 속도조절을 하며 겸손하게 살려는 마음 다짐이었을 것이다. 그의 인생은 참으로 화려했다. 20대 젊은 나이에 중앙언론사 논설위원이 된 뒤 시인, 소설가, 평론가, 대학교수로 살다 문화부 장관까지 지냈으니 세상 부러운 게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크나큰 고통이 있었다. 미국에서 변호사가 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운 딸이 결혼한 지 5년 만에 이혼을 하고, 대학생 외손자가 돌연사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후에 목사가 된 딸도 위암에 걸려 아버지보다 10년이나 먼저 하늘나라로 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이어령에게 ‘메멘토 모리’는 아주 각별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딸의 투병과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더욱 깊이 되새김질하지 않았을까 싶다. 지적 탐구에 몰두하며 종교와 거리를 두고 살았던 그가 인생 말년에 결국 영성을 받아들인 데서 그의 고뇌를 읽을 수 있다. 죽음은 출생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지 영원히 닫혀버리는 어떤 결말이 아니라고 생전에 스스로 말한 적이 있다.   

 

“목숨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기저귀를 차고 나온다/ 아무리 부드러운 포대기로 감싸도/ 수의의 까칠한 촉감은 감출 수가 없어/ 잠투정을 하는 아이의 이유를 아는가”


이어령의 자작시 ‘메멘토 모리’의 시작 부분이다. 삶과 죽음이 한 뿌리임을 애써 강조하는 듯하다. 시에서 이어령은 인생의 허무만을 말하지 않는다. 누구나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값지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전하려 했다. 그런 의미에서 ‘메멘토 모리’를 가급적 빨리 깨닫는 게 좋다고 시인은 노래했다.


그렇다. 죽음은 슬프고 두려운 것이지만 숙명이기 때문에 겸허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살다 보면 언젠가 자신의 죽음도 만나겠지만 그에 앞서 부모형제나 친지의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영원한 이별이 불가피한 크나큰 아픔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회피하거나 금기시하기보다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어떤 작가는 사랑하는 사람과 저녁 식탁에서 자연스럽게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막상 죽음이 닥쳤을 때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고 손쉽게 극복할 수 있다.


죽음을 익숙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더 큰 이유는 이어령이 말했듯이 현재의 삶을 더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다. 누구든지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야만 오늘을 충실하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레프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


“삶을 깊이 이해하면 할수록 죽음으로 인한 슬픔은 그만큼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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