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처럼 Jul 28. 2023

<8> 젊은 날의 방황은 보약일 수도 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이현세(만화가)의 좌우명의 좌우명


‘공포의 외인구단’을 그린 유명 만화가 이현세(1956~ )에게는 슬픈 가족사가 있다. 분단과 전쟁에 따른 이념 대립, 보수적 유교 가족주의 탓에 아버지에 대한 뼈아픈 기억을 안고 산다. 사연을 정리하면 이렇다. 


이현세 아버지는 삼 형제였다. 한국전쟁으로 고향인 경북 울진(당시는 강원도)이 북한에 점령되자 집 나갔던 둘째가 인민군이 되어 나타났다. 어른들에게 “곧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말 한마디 남기고는 훌쩍 떠나버렸다. 남한이 수복하자 관청에서 나와 “빨갱이 가족을 두었다”며 첫째를 연행해 갔다. 얼마 전 결혼까지 한 첫째는 전쟁이 끝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삼 형제 중 막내만 남은 셈이다. 막내가 낳은 첫째 아들이 바로 이현세다. 어른들은 무엇보다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며 이현세가 태어나자마자 큰 어머니 앞으로 양자를 보냈다. 갓난아기 때부터 큰 어머니를 친모로 알고 함께 살았으니 친부와 친모는 당연히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인 줄 알고 자랐다.


9세 때 친부가 감전으로 갑자기 사망했으나 ‘작은 아버지’의 죽음이 그다지 슬프지 않았다. 장례식장에도 가지 않았다. 한참 세월이 흘러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이현세는 미대에 가려고 신체검사를 했다. 그러나 색약 판정으로 미대 진학의 길이 막히고 말았다. 그에게는 맑은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이 무렵 그는 더 큰 날벼락을 맞아야 했다. 극비 가족사를 처음 알게 된 것이다. “작은 어머니가 날 낳아준 친모라고? 9세 때 돌아가신 작은 아버지가 친부라고? 나에게 이런 무시무시한 출생의 비밀이 있었다니….”


이현세는 방황의 수렁에 빠졌다. 그토록 좋아하는 그림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앞날이 캄캄했다. 그때 친모, ‘작은 어머니’의 한 맺힌 꾸지람이 귀에 확 들어왔다. “자식에게 더운밥 한 끼 먹이지 못한 어미의 마음을 네가 아느냐?” 


눈물의 반성을 한 이현세는 그 길로 학창 시절을 보낸 경주를 떠나 넓은 땅 서울로 향했다. 그리고는 인생의 차선책으로 색깔이 중요하지 않은 만화를 그리기로 결심한다. 책상 앞 벽에다 한자로 된 큼직한 글귀를 하나 써 붙였다. ‘盡人事待天命’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한 다음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뜻이겠다. 이현세의 변함없는 인생 좌우명이다. 밤낮 가리지 않고 만화만 그렸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하늘이 돕는 법이다. 1980년대 초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시작된 만화시장 인기몰이는 ‘까치의 날개’ ‘남벌’ ‘천국의 신화’ 등을 거치면서 어느덧 그를 만화계의 지존으로 만들었다.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방황을 한두 번 경험한다. 내 인생의 북극성, 그것을 아예 찾지 못했거나 갑자기 사라지는 형국이다. 방황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자신을 재발견하고 더 가치 있는 길을 안내하는 여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청춘의 방황은 긴 인생에서 좋은 약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방황은 이현세처럼 짧아야 한다. 너무 길면 삶이 피폐해질 수 있다.


방황 끝에 새로운 길을 찾았으면 이제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 이럴 때 ‘진인사대천명’은 멋진 좌우명이 될 수 있겠다.

작가의 이전글 <7> 삶이 충만해야 죽음이 두렵지 않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