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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Aug 19. 2023

<24> 참을성을 벗으로 삼아라

참자, 용서하자, 기다리자

-노태우(전직 대통령)의 좌우명



1991년 11월, 이어령 문화부 장관이 급히 노태우(1932~2021) 대통령을 면담했다. 


문화재 전시와 관련해 대통령에게 항의하는 자리였다. 정부는 유엔가입 기념으로 유엔본부에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재 한 점을 전시 기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외교부가 문화부 의견을 들어보지도 않고 신라금관 모조품으로 결정해 대통령 재가까지 받았다.


이를 뒤늦게 알고 잔뜩 화가 난 문화부 장관이 대통령 면담을 신청한 것이다. “문화재는 저희 소관입니다. 그런데 신라금관은 너무 작아서 눈길을 끌지 못합니다. 월인천강지곡 목판인쇄본이 좋겠습니다.” 옳다고 생각한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외교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양해를 구한 뒤 문화부 손을 들어줬다.


이어령이 의기양양하게 집무실을 나서는데 대통령이 한마디 했다. “그런데 이 장관, 혹시 제 좌우명이 뭔지 아시나요? 참용기입니다. 참자, 용서하자, 기다리자. 이제껏 그런 자세로 살다 보니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장관이 한 방 얻어맞은 기분으로 얼굴을 붉히는데 대통령은 환히 웃고 있었단다. 이어령은 후회하고 반성했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저는 상하관계에 얽매인 직장을 다닌 적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 남과 융화하거나 타협하는 일에 서툽니다. 제가 하도 목소리를 내니까 노 대통령이 참용기에 대해 말씀한 것 같습니다. 참용기를 진작 익힐 걸 하고 후회했습니다.”


노태우는 육사 동기생 전두환을 도와 정치 쿠데타까지 한 사람이지만 천성적으로 침착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지녔다. 군과 정치에 몸담으면서 항상 전두환을 뒤따라야 했다. 그럼에도 불만이 없었다. 2인자 자리에서 만족하며 꿋꿋이 참고 기다렸다. 대통령 시절 민주화 요구로 각종 시위가 거셌지만 정부 내 강경파의 군사력 동원 요구를 묵살했다. 이 때문에 ‘물태우’란 벌명까지 얻었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3당 통합 이후에는 집권당 대표 김영삼에게 정국 운영권을 넘겨줘야 했다. 큰 수모임에도 잘 참아냈다. 덕분에 국정은 안정됐고, 그걸 바탕으로 공산권 국가들과 연쇄 수교하는 북방정책에 큰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참을성도 큰 능력이다. 우리는 보통 화가 나면 짜증내거나 분노의 말을 쏟아낸다. 그리고는 금방 후회한다. 화는 상대방을 아프게 할 뿐만 아니라 십중팔구 자기 자신도 아프게 하기 때문이다. 화는 무조건 참고 유예하는 것이 좋다. 사안 자체가 별 것 아닌 것으로 드러날 가능성이 적지 않은 데다 시간 지나면 저절로 해결되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참을성을 벗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다.


세상사 기다림이 보약인 경우는 참 많다. 기다림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갖고 기회를 엿보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기다릴 줄 안다. 일단 시간에게 해결을 맡긴다. “인간의 지혜는 단 두 단어, ‘기다림’과 ‘희망’으로 집약된다.” 프랑스 작가 알렉산드르 뒤마의 말이다.


강에 한창 흙탕물이 일 때는 헤엄치는 것을 멈추고 가만히 있는 것이 좋다. 진흙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효율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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