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처럼 Aug 26. 2023

<33> 과거시험 비웃으며 문풍을
개혁하다

인순고식 구차미봉(因循姑息 苟且彌縫)

-박지원(조선 후기 실학자)의 좌우명



‘열하일기’를 쓴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어릴 때부터 총명해 큰 인물이 될 것이란 소리를 듣고 자랐다. 하지만 그는 당시 출세 필수 코스인 과거시험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격한 당쟁이 젊은 선비에게 관직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과거시험이 치러질 때마다 박지원의 실력을 아는 사람들이 도움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아예 응시하지 않거나 응시는 하되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곤 했다. 한 번은 답안지에 고송(孤松)과 괴석(怪石)을 그리기도 했다.


팔도유람을 즐기며 20대를 보낸 박지원이 33세 때 임금의 특별한 관심으로 관직에 오를 뻔했다. 감시(監試, 일종의 소과) 1차 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하자 임금이 대궐로 그를 불렀다. 그리고는 도승지에게 답안지를 읽게 한 뒤 크게 칭찬했다. 친구들의 강권으로 2차 시험인 회시(會試)에 응했지만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았다.


그는 기존 제도와 질서에 편입되는 것을 생래적으로 싫어한 사람이다. 그가 선택한 길은 부귀영화 단념하고 재야학자로 사는 것. 이즈음 그는 집안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인순고식 구차미봉(因循姑息 苟且彌縫)’ 여덟 글자가 새겨진 병풍을 두고 지냈다. 그의 인생 좌우명이다.


인습을 고치려 하지 않고 당장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과 떳떳하지 못하고 비겁하게 굴며 일을 대충 끝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풍조 때문에 세상이 발전하지 못한다며 스스로 여기에 빠지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사회개혁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그는 실천적인 학문에 관심 있는 젊은 선비들과 즐겨 어울렸다.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홍대용 등이다. 이른바 북학파 실학자들이며, 앞의 세 사람은 서얼 출신이다. 


벼슬도 없는 박지원이 무슨 개혁을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장기인 글쓰기에선 강력한 개혁 의지를 드러낸다. 43세 때 사신단 일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집필한 불세출의 기행문 ‘열하일기’는 지식인 사회를 크게 뒤흔들어놓았다. 고문(古文)의 진부한 표현에서 벗어나 풍자와 반어, 유머와 해학이 넘치는 문장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정조 임금에 의해 문체반정(文體反正) 조치가 내려질 정도였다.


그는 글쓰기에 관한 한 혁명가나 다름없었다. 고문을 답습하는 문풍을 공개적으로 조롱했다. “나는 사마천이 다시 살아나도 그를 배우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글쓰기 기법은 그의 ‘양반전’과 ‘허생전’에도 잘 나타난다.


박지원은 자기 좌우명처럼, 인습을 따르지 않고 변화를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 편안했을 리 없다. 하지만 그는 행복했을 것이다. 관습에 반하는 행동에 대해 세상의 비판이나 저항이 컸지만 진정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했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기존 질서 편입을 거부하고 독창적인 삶을 사는 것은 외롭고 힘들다. 혼자 깨닫고, 혼자 행동하고, 혼자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번 사는 인생, 뭔가 남들과 다르게 살아보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가 아닌가. 불교 경전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말이다.

 

“저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작가의 이전글 < 32> 열정은 재능을 창조할 수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