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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Oct 11. 2023

<57> 신중함, 침착함도 용기다

처변불경 처변불경(處變不驚 處變不輕)

-덩샤오핑(중국의 중앙군사위 주석 역임)의 좌우명



 197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 아침 서울 명동 인근 대연각호텔에 불이 났다. 투숙객 191명이 사망하고 68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호텔은 모든 층이 새까맣게 타버렸다. 박정희 대통령이 현장에 나와 화재 진압을 독려하고, MBC가 상황을 생중계한 그날, 특별히 뉴스가 된 인물이 있었다.


주한 중화민국(대만) 대사관의 위셴룽(余先榮) 공사. 11층 객실에 투숙해 있던 그는 갑작스러운 화재로 호텔 전체가 아비규환임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이불이나 매트리스, 커튼에 의지해 뛰어내리는 등 우왕좌왕할 때 그는 목욕탕에 물을 가득 받아놓고 젖은 이불로 온몸을 감쌌다. 그리고는 벽에다 ‘처변불경(處變不驚)’이란 글을 써 붙인 뒤 차분하게 구조를 기다렸다. 


위셴룽은 무려 10시간이나 지나 진압대원들이 수색하는 과정에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다. 호흡기에 중화상을 입어 안타깝게도 10일쯤 뒤 숨졌지만 그의 남다른 침착함은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처변불경,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놀라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당시 그의 이런 행동이 합리적인 것이었는지 여부는 선뜻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천천히’라는 뜻을 가진 중국인의 ‘만만디(慢慢地)’ 정서와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중국의 지도층 인사들은 ‘처변불경(處變不驚)’이란 말을 즐겨 쓴다. 중화민국 총통을 지낸 장제스는 중화민국이 UN에서 밀려났을 때, 미국과 공산 중국이 수교 움직임을 보일 때 이 말을 사용하며 애써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


‘작은 거인’이라 불리며 1980년대 중국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던 덩샤오핑(1904~1997)은 ‘처변불경 처변불경(處變不驚 處變不輕)’을 아예 자신의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다. 뒷부분의 처변불경(處變不輕)은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가볍게 처신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그는 길고도 험난한 정치 인생을 헤쳐 나오면서 이 글귀를 수없이 되뇌었을 것이다.


덩샤오핑은 일찍이 마오쩌둥과 사회주의 혁명을 함께 해 성공을 거두었지만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시기를 거치며 실각과 복권을 여러 차례 거듭했다. 오뚝이, 부도옹(不倒翁)이란 별명을 얻게 된 이유다. 권력에서 밀려났을 때 그는 일희일비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릴 줄 알았다.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그는 어렵지 않게 최고 지도자가 되었고, 경제 실용주의 노선을 도입해 부강한 중국을 만드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어떤 일을 하면서 순간의 기회를 포착해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한국인들에게 유리한 태도이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신중하면서도 침착하게 대응해야 한다. 돌발 상황에서 경솔하게 호들갑을 떨다 예상 밖의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허둥대다 일을 크게 그르치는 경우를 일상에서 자주 보지 않은가.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라는 속담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신중하고 침착한 처신이 자신감 없다거나 소심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큰 용기일 수가 있다.


“용기의 핵심 부분은 신중함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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