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의 좌우명
조선 후기 문신 이양연의 시 ‘야설(野雪)’이다. 짧은 시지만 울림이 크다. 이양연은 동지중추부사, 호조참판 등 여러 벼슬을 지냈으나 문인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어느 날 밤 큰 눈이 내렸다. 볼일이 있어 아침 일찍 길을 나섰더니 앞서 지나간 흔적이 전혀 없다. 내가 걷는 발자국 하나하나가 처음이다. 그러니 내 발자국이 뒤따라 오는 사람에게 이정표가 된다. 내가 안전한 지점에 발자국을 남겨야 다른 사람이 안전하다. 내가 아무렇게나 걸을 경우 뒤에 오는 사람이 따라 걷다가 넘어지거나 자빠질 수 있다.
인생을 먼저 사는 사람이 매사에 모범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겠다. 시의 행간을 들여다보면 선한 이름을 남기고 싶은 선비의 간절함도 엿보인다. 항일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1876~1949)가 이 시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인생 좌우명으로 여겨 자주 휘호 문구로 삼았다.
김구의 삶은 힘들고 외로웠지만 자못 당당했다. 독립을 평생의 직업으로 삼았으며, 광복 후 중국에서 귀국해서는 이승만에게 밀려 정치적으로 고전했으나 원칙을 지키려고 무진 애썼다. 미국이 선호하는 이승만과 소련이 앞세운 김일성의 대립으로 한반도 분단이 가시화되자 이를 막겠다며 남한만의 자유 총선거 실시를 끝까지 반대한다.
총선거를 눈앞에 둔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하겠다며 우익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38선을 넘었다. 38선에서 그는 애송시 ‘야설’을 읊은 것으로 전해진다. 분단을 막으려 최선을 다했다는 흔적을 역사에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비록 분단되더라도 자신의 방북이 이정표가 되어 하루빨리 남북이 통일되길 기원했을 것이다.
인생에서 누군가에게 삶의 이정표가 되기 위해서는 올곧게 살아야 한다. 뒤따라 오는 사람에게 등대 역할을 해야 한다. 등대는 대낮보다는 한밤중이나 악천후 때 필요하다. 등대 역할을 자임하고 올바르게 살다 보면 역사에 선한 이름이 새겨진다.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이다.
한번 사는 인생, 큰 불 밝히는 등대가 아닐지라도 자그마한 손전등은 켜놓고 살아야겠다. 비록 크게 성공했다는 평을 듣지 못하더라도 욕먹지 않고 착하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장례식장에 가보면 안다. 고인이 눈 덮인 들판을 똑바로 걸었는지 어지럽게 함부로 걸었는지 품평이 이루어진다.
거창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 가정에서도 부모는 자녀에게 이정표 역할을 하게 되어있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엄마와 어린 딸이 함께 길을 걷는다고 치자. 딸이 엄마가 안전하게 디딘 발자국 위에 발을 넣고 따라 걸으면 다칠 일도 없고, 눈이 신발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는다.
부모는 자녀에게 이정표이자 등대이자 거울이다. 어린 자녀는 부모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사는지 유심히 지켜보며 자란다. 따라 하거나 모방하는 것은 당연하다. 좋은 습관이든 나쁜 습관이든 대물림되는 이유다. 누구나 편리하고 안전한 이정표가 되도록 애써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