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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May 05. 2021

2-16 잘 사는 것이 최상의 복수다

용서하면 더없이 좋아. 힘들겠지만 앙갚음 단념해야 내가 행복

<복수에 대한 명언>


*복수를 하려면 제일 먼저 무덤 두 개를 파두어라.(일본 속담) 

*'눈에는 눈’을 고수한다면 세상에는 장님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마하트마 간디)

*이 세상에서 원한은 원한에 의해서는 결코 풀어지지 않는다. 원한을 버릴 때만 풀리나니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다.(법구경)

*개에게 물린 상처는 개를 죽인다고 아물지 않는다.(에이브러햄 링컨)

*잘 사는 것이 최상의 복수다.(로버트 에반스)


<생각 나눔>


세상 살다 보면 복수심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원수를 갚는다’는 식의 거창한 복수는 드물겠지만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고 되갚아줘야겠다는 생각을 해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복수는 나쁜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복수의 감정이 미덕이자 이성적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복수는 누군가에게 무시당했을 때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감정이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었다. 그가 살았던 그리스 시대엔 아마 사적인 복수가 횡행했을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복수의 여신 메데이아가 오빠와 동생, 남편, 자녀까지 죽이고도 여생을 잘 사는 것으로 묘사된 걸 보면 복수가 일정 부분 미화되는 세상 아니었을까 싶다.


 과거엔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도 복수가 허용되었다. 아버지나 형제를 죽인 사람을 원수로 규정해 끝까지 추적해 살해하곤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겁쟁이로 지탄받았다. 중국에는 ‘30년 전의 일이라도 복수하지 않으면 사나이가 아니다’란 말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협객이 박수받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국가 형벌권이 확립되고 나서야 사적인 복수가 금지되었다.


복수는 인간의 극단적이며 원초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또 다른 복수를 부른다. 보복이 그것이다. 복수를 국가의 배타적 형벌권에 포함시킨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원수를 사랑하라, 그리고 복수는 하느님한테 맡기라는 성경 가르침은 그래서 좋다. 


복수심을 불태우는 사람의 심리상태와 행동양식을 생각해보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거지향적 사고, 감정관리 소홀, 공감능력 부족, 흑백논리 몰입, 자기 인식 부족 등이 그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복수를 실행할 경우 불행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원한은 결코 원한으로 풀 수 없다는 법구경의 가르침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복수를 하더라도 자기 삶에 도움이 되도록 실효성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 복수하는 사람과 복수당하는 사람 모두 피해만 입을 게 뻔하다면 단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복수를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잘못된 일이 벌어졌을 때에만 복수의 감정이 덕일 수 있고, 그래서 행복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복수는 똑같은 가해자가 앞으로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막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이다.


가장 좋은 복수는 역시 복수하지 않고 용서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지 않고서는 복수의 고리를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 킹은 말했다. “어둠으로 어둠을 몰아낼 수는 없습니다. 오직 빛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증오로 증오를 몰아낼 수는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평소 자신을 ‘오리지널 고릴라’라 부르며 못생긴 촌뜨기라고 경멸하던 정적 에드윈 스탠톤을 국방장관에 기용함으로써 화해했다. 참으로 훌륭한 링컨식 보복이다.


현인들이 이구동성으로 강조하는 용서, 그러나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엄청난 인격 수양이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나온 복수 방법이 상대방이 배가 아프도록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잘 사는 것이 최상의 복수다.” 영화 ‘대부’와 ‘러브스토리’를 제작한 로버트 에반스의 생각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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