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행의 근본인 효, 본보기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
*천하의 모든 물건 중에 내 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 그런데 이 몸은 부모가 주신 것이다.(이이)
*5개 형벌의 죄목이 3000개에 이르되 불효보다 더 큰 죄는 없다.(공자)
*자기 부모를 섬길 줄 모르는 사람과는 벗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는 인간의 첫걸음을 벗어났기 때문이다.(소크라테스)
*내가 어버이께 효도하면 자식이 또한 나에게 효도한다. 내가 어버이께 효도하지 않는데, 자식이 어찌 나에게 효도하겠는가.(강태공)
*물레를 돌리게 해도 효도일 수 있고, 잔칫상을 차려드려도 불효일 수 있다.(유대 격언)
아바님 날 낳을시고 어마님 날 기르시니
두 분 곳 아니시면 이 몸이 살아시랴
하날 같은 은덕을 어디다혀 갚사올고
어버이 살아신 제 섬길 일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아 엇지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고교시절 익혔던 송강 정철의 훈민가 일부다. 효의 의미와 중요성을 이토록 가슴에 와 닿게 읊은 글이 또 있을까. 이런 명문이 있었기에 수백 년 뒤 양주동 박사의 주옥같은 노랫말 ‘어버이 은혜’가 탄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핵가족화와 개인주의가 횡행하면서 효의 의미나 방식이 많이 바뀌었지만 그 바탕은 변함이 없다. 여전히 백행(百行)의 근본이라 해서 틀린 말이 아니다. 율곡 이이의 말처럼 가장 소중히 여기는 내 몸을 부모가 주었으니 그 인연은 끊으래야 끊을 수 없는 일 아닌가. 2500년 전에 살다 간 동서양 대표 현인 공자와 소크라테스가 이구동성으로 불효의 죄악을 엄하게 지적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럼에도 예나 지금이나 효도는 그리 쉽지 않다. 자식 사랑하는 것만큼 부모 섬기기를 하지 못하는 게 인간이다. 많은 현인들은 자식 키우는 것만큼만 정성을 기울이면 누구나 효자, 효녀가 된다고 말한다. ‘내리사랑은 쉽지만 치사랑은 어렵다’는 우리 속담이 딱 맞는 말이다.
효는 말보다 행동으로 가르치는 게 효과적이다. 자녀도 효를 부모의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배운다.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아이들은 자기 부모가 조부모한테 어떻게 하는지를 보고 그대로 따라서 배운다. ‘부모가 온 효자가 되어야 자식이 반 효자라도 된다’는 속담이 빈말이 아니다.
강태공도, 소크라테스도 이 점을 정확히 간파한 듯하다 “네 자식이 해 주길 바라는 것과 똑같이 네 부모에게 효도를 행하라.” 소크라테스가 남긴 말이다.
요즘 젊은이들, 흔히 “난 자식한테 효도받을 생각 없어”라고 쉽게 말한다. 함부로 해선 안될 말이다. 효는 굳이 내가 받으려고 가르치는 게 아니라 백행의 근본이기 때문에 반드시 가르쳐야 하는 덕목이다. “부모를 사랑하는 사람은 남을 미워하지 않으며,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남을 얕보지 않는다.” 효를 몸소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세상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이다.
원래 효도는 물질과 마음 두 가지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물질이 풍부해진 요즘은 마음이 훨씬 더 중요한 것 같다. 유대 격언이 가르치듯 물질이 부족했던 옛날 옛적에도 마음을 더 중시했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랴.
논어에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요즈음은 부모에게 물질로써 봉양함을 효도라 한다. 그러나 개나 말도 집에 두고 먹이지 않는가. 공경하는 마음이 여기에 따르지 않으면 짐승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부모 마음 편하게,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 최고의 효도이지 싶다.
더 중요한 것은 효도할 수 있는 시기가 누구에게나 한시적이라는 점이다. 자식을 길러본 후에야 부모의 마음을 안다지만 그땐 이미 늦다. 시경(詩經) 해설서인 한시외전에 나오는 풍수지탄(風樹之嘆)이다.
나무는 고요히 머물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님은 기다려주시지 않네
한번 흘러가면 쫓아갈 수 없는 것이 세월이요
돌아가시면 다시 뵐 수 없는 분이 부모님이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