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처럼 Nov 04. 2021

<12> 사랑, 미루지 말라

지금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이 가장 좋은 사랑이다

“그러니 기억하게.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로 지금이라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시간에만 우리가 자신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네. 가장 필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그 사람인데,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라네. 우리는 오직 그것을 위해서만 살아가도록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라네.”

-레프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



러시아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우화집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느 날 그는 여행길에 올랐다. 날이 저물어 주막에 들렀는데, 예닐곱 살짜리 딸아이가 있었다. 몸이 아파 가냘픈 모습을 한 소녀는 톨스토이가 가진 빨간 가방이 예쁘다며 달라고 졸랐다.


가방은 얼마 전 친지가 유품으로 전해준 소중한 물건이지만, 소녀가 진심으로 원했기에 돌아오는 길에 주기로 약속을 했다. “아가야, 이 가방엔 소중한 물건이 들어있어 지금은 줄 수가 없단다. 돌아오는 길에 반드시 너한테 줄게.”


일주일쯤 뒤 톨스토이는 약속을 지키려고 주막에 들렀다. 그러나 소녀는 병이 악화돼 며칠 전 죽었다고 어머니가 전했다. 톨스토이는 마음이 아파 어머니를 앞세워 소녀의 무덤을 찾아갔다. 원할 때 가방을 곧장 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소녀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는 자그마한 비석을 세워 자책하는 문구를 하나 새겼다. ‘사랑을 미루지 말라.’


이 우화는 톨스토이가 일생 동안 찾고자 했던 ‘사랑’을 아주 단순 명료하게 표현한 것이다. 사랑은 누가 뭐래도 ‘바로 지금’(Here & now)이란 얘기다. 이를 조금 풀어쓴 것이 단편 ‘세 가지 질문’ 아닐까 싶다. 위에 소개한 글은 ‘세 가지 질문’의 결론 부분이다.


톨스토이는 75세 노년기에 이 단편을 썼다.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이렇다. 어느 날 황제가 각각의 일에 합당한 시간이 언제이며, 어떤 사람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사람에 큰 상을 내리겠다고 공표했다.


 세 가지 질문에 온갖 사람들이 앞다퉈 의견을 내놨다. 첫 번째 질문에는 연월일 시간표를 만들어라, 합당한 시간을 마법사에게 물어보라 같은 의견이 나왔으며 두 번째 질문에는 성직자, 의사, 군인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라고 답하는 사람이 많았다. 세 번째 질문에는 학문, 군사기술, 신에 대한 경배가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답했다.


대답이 크게 엇갈리는데 실망한 황제는 평민으로 변장을 한 채 숲 속 현자를 찾아가 세 가지 질문에 답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몸이 연약한 현자는 아무 대답도 없이 밭고랑 파기만 계속했다. 보다 못한 황제가 삽을 넘겨받아 해질 무렵까지 땅 파기를 도와준 뒤, 지금 답해주지 않으면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때 어떤 남자가 다쳐서 피투성이가 된 배를 움켜쥐고 달려오고 있었다. 황제는 붕대와 수건으로 깨끗이 그를 치료해 주었다. 다음 날 그 남자는 황제에게 다가와  “나를 용서해 주시오”라고 말했다. 남자는 계속 말했다.


“나는 당신이 내 형제를 처형하고 내 재산을 몰수했기에 당신에게 복수를 맹세한 원수요. 나는 당신이 현자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죽이기로 결심하고 숲 속에 숨어 있었소. 그런데 하루가 지나도 오지 않아 이곳으로 향했는데 당신 호위병이 나를 발견하고 부상을 입혔소. 그러나 당신은 고맙게도 나를 정성껏 치료해 생명을 구해주었소. 당신 때문에 내가 살았으니 이제 당신의 충실한 종이 되겠소.”


황제가 다시 현자에게 답을 달라고 했다. 현자는 말했다. “벌써 답이 나오지 않았는가. 만일 자네가 연약한 나를 위해 밭고랑을 파주지 않고 돌아갔다면 저 남자가 자네를 공격했을 것이니 가장 중요한 시간은 자네가 밭고랑을 팠던 때이고, 내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나를 위해 선한 일을 해준 것이라네. 자네가 치료해준 저 남자도 가장 중요한 사람이지.”


톨스토이는 16세 아래 젊은 여성과 결혼을 하고, 온갖 여성 편력을 남겼지만 사랑에 관한 한 대체로 실패한 인생이었다. 그는 백작 가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두 살 때 어머니,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고모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카잔 대학교 동양어학과에 입학했으나 학업에 불성실하고 사교계에 드나들면서 진급시험에 떨어졌다. 법학부로 옮겼으나 그마저 중퇴하고 고향 농장에서 농민생활 개선에 힘썼지만 건달로 취급받았다. 톨스토이는 그러나 20대 초반부터 단편, 중편을 발표하면서 소설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37세에 불후의 명작 ‘전쟁과 평화’를 발표해 명성을 얻은 뒤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으며, 안나카레니나(49세) 부활(71세) 등으로 최고의 작가로 등극했다. 톨스토이는 평생 사랑을 갈구했다. 어린 시절이 외롭고 불행했기 때문일까. 40대 중반 한때 자신이 쓴 작품이 하나같이 무의미하다며 소설 쓰기를 거부했던 그는 노년기 단편에선 사랑을 탐구하는 구도자의 모습을 보였다.


귀족으로서의 명예와 부를 아낌없이 버렸으며, 무지몽매한 민중을 깨우치고자 노력했다. 그가 ‘예수 이후 최고의 스승’이라 불리는 이유다. 82세로 죽기 2년 전에 완성한 잠언집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가 그 결정판이다. 인생을 회고하며 명상을 통해 인생의 진리를 탐구한 책이다. 톨스토이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틈틈이 읽어주며 각자 삶의 지침으로 삼을 것을 권했다.


짤막한 글귀들을 모아 엮은 이 책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한마디로 뭉뚱그려 표현하자면 역시 사랑이다. 100년을 훨씬 넘긴 글이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명언이다.


“가장 중요한 일은 나와 인연 맺은 모든 이들을 사랑하는 일이다. 몸이 불편한 이, 영혼이 가난한 이, 부유하고 비뚤어진 이, 버림받은 이, 오만한 이까지도 모두 사랑하라. (중략) 사랑은 우리 영혼 속에 산다. 타인 또한 자기 자신임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람은 오직 사랑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대가를 바라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의 핵심은 주위 모두에게 무조건 축복을 베푸는 데 있다. (중략) 이유를 가진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만이 영원하다. 이런 사랑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커진다.”


톨스토이는 역시 현재의 사랑을 최고로 여긴다. “사랑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 하지만 과거나 미래에 사랑할 수는 없다. 오직 현재, 지금 이 순간에만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성스러운 발현이다. 성스러움에는 시간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랑은 오직 지금 이 순간에 발현되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평생 ‘지금 이 순간의 사랑’을 강조했지만 자신이 모범을 보여주지는 못한 것 같다. 하녀, 농노의 아내, 집시 여인, 친척 아주머니 등 수많은 여성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져 평생의 반려자 소피야 안드레예브나를 힘들게 했다. 그의 결혼 생활은 15년 정도 순탄했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은 지독히 불행했다.


노년엔 자신의 재산과 저작권을 사회에 기부키로 하면서 부인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결국 그는 민중 속으로 들어가 참된 사랑을 실천하고자 집을 나섰다가 허름한 기차역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톨스토이의 삶과 작품을 고찰해 보면,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말은 쉽게 할 수 있다. 누구나 아는 진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배우자, 부모, 자녀, 형제자매, 친구, 직장동료, 이웃 사람 등이 대표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들 모두 사랑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거창한 기부나 자선이 다가 아니다. 밝은 표정으로 다정하게 건네는 말 한마디, 안부 묻는 전화 한 통화, 정성 담긴 식사 한 끼, 자그마하지만 예쁜 꽃 한 송이라도 괜찮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나누면 두 배가 되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고 했다. 사랑은 받는 사람만큼 주는 사람도 행복하다는 뜻 아닐까 싶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행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직 현재만 있을 뿐이다. 지금 당장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인용하거나 참고한 책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레프 톨스토이, 홍대화 옮김, 현대지성, 2021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레프 톨스토이, 이상원 옮김, 조화로운삶, 2014

<안나카레니나> 레프 톨스토이, 박형규 옮김, 문학동네, 2012

작가의 이전글 <11> 담대하게 전진하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