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D(강박장애)를 딛고 날아오르다.

40세에 강박장애를 딛고 첫 직장을 가진 클라이언트의 이야기

by HaDa

안녕하세요, 미국에서 정신건강 상담사로 일하고 있는 하다입니다. 오늘 전해드릴 열한 번째 이야기는, 강박장애를 안고 살아가던 클라이언트가 용기를 내어 세상과 다시 연결되고, 마침내 자립에 이르게 된 여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하다 씨, 펜을 주어주시겠어요?"

"아니요, 필립이 직접 주우세요."

"바닥에 세균이 있어요, 제가 펜을 주우면 제 손이 더러워질 거예요."

이 날은, 필립의 행동을 관찰하기 위해, 끝까지 필립이 바닥에 떨어진 펜을 줍게 할 작정이었다.

"그럼 펜을 주은 다음에 손을 씻으러 같이 가요, 주으세요."

"휴..."

필립은 조심스럽게 펜을 들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손목이 떨어져 나갈 듯, 연신 손을 털었다.

"필립, 여기 손 소독제를 쓰고, 같이 손 씻으러 가요."

그러나, 그의 눈빛은 이미 달라져 있었고, 그의 행동을 멈출 수 없었다.

"189, 190, 191... 200."

필립은 200번 손을 털고, 5분간 손을 닦아야만 안심할 수 있다고 했다. 떨어진 물건을 만지는 일은, 그에게 생존의 의식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돼요?"

"그렇게 안 할 수가 없어요. 안 그러면... 저는 세균에게 잡아먹혀요."

필립의 강박은 이미 그의 삶 대부분을 잠식하고 있었다. 시설의 방에서 나오기 위해, 그가 체크해야 하는 물건과 정리해야 하는 배치는 수도 없이 많았다. 나가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1시간 반 정도. 그 모든 과정을 마쳐야만 문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필립은 올해 40살이다. 하지만 지금껏 직업을 가져본 적은 한 번도 없다. 33살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았지만, 점차 심해진 강박에 조울증까지 겹치며 그는 결국 폐쇄 병동과 정신건강 집중관리 프로그램을 오가는 생활을 7년째 반복하고 있다.


그의 심각한 강박적 사고와 행동으로 인해, 상담을 시작하고 나서도 3주가 지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현실적인 치료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그가 반평생 넘게 반복해 온 강박 행동을 단기간에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대신, 강박 행동은 유지하되 그 시간을 줄이고, 그가 믿고 있는 비현실적인 생각들을 직접 경험을 통해 재구성할 수 있도록 돕기로 했다. 예를 들어, 필립은 자신의 물건을 방 안에 두고 외출하면 모두 흐트러지거나 도난당할 것이라 믿었다. 이런 사고 때문에 그는 좀처럼 방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의 서랍에 자물쇠를 달아주고, ‘모든 게 그대로일 수 있다’는 경험을 하게 했다. 시설 앞의 3분 거리부터 시작하여, 조금씩 거리를 늘여 한 달쯤 지나고 서야, 우리는 시설 밖으로 차를 가지고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건 스타벅스 커피였다. 커피를 사러 가기 위해 10분을 가서, 따뜻한 라테 한 잔을 사고, 공원에 가면 그는 웃으며 내 옆을 걸었다. 그리고 시설로 돌아오는데 왕복 1시간이 걸렸으니까 필립은 이제 한 시간의 외출이 가능해진 셈이었다.


하루에 환자를 5명 정도 만나는 상담사로서, 시설에서 6-7시간 정도 머무르기 때문에, 시설 관리자들과 꽤나 가깝게 지내는 편이다. 하루는 관리자에게 필립에게 일을 시켜 줄 수 있냐고 물었다. 관리자는 매점에서 물건을 팔거나 전화받는 일을 제안했다. 전화를 받는 일은 거의 반나절을 얽매여야 하지만 일주일에 3번

1시간 동안 매점 물건을 판매하는 일을 괜찮을 듯하여, 필립에게 매점 판매일을 제안하였다. 조금 꺼리면서도 일을 궁금해했고, 며칠 동안 고민하던 그가 일을 해보겠다고 말했다. 시설은 그의 첫 직장이 되었다.


물론, 필립은 여전히 다른 사람과의 신체 접촉에 큰 불편함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일을 했다. 시설에서 지내는 거주자들이 물건을 사러 오면, 돈은 돈통에, 물건은 조심스레 다른 쪽 통에 놓고, 불필요한 신체접촉을 피했다. 조금은 특이한 거래 방식이었지만, 불편함을 호소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모두 그를 존중했고, 필립도 자신의 리듬대로, 하지만 성실하게 그 자리를 지켜냈다.


또한, 그의 강박 행동의 일부로 습관화된 정리와 청소는, 빛을 발했다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매점이라는 작지만 물건으로 꽉 찼던 공간을 늘 깨끗함을 유지하게 만들었다. 진열대는 반듯했고, 바닥에도 선반에도 먼지란 없었다. 물건들은 필립의 손을 거쳐 항상 제자리에 가지런히 놓였다. 그가 맡은 일은 분명 단순했지만, 그 단순한 일을 얼마나 충실하게 해내느냐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필립은 그 일을, 누구보다도 진지하고, 책임감 있게 해냈다.


12월, 한 해가 저물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레크리에이션 담당자가 더 큰 시설로부터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그녀는 제안을 받아들여 시설을 떠났다. 미국에서 12월은 구인난이 심한 시기라 사람을 새로 구하기 어려웠고, 프로그램은 순식간에 공백 상태가 되었다. 거주인들은 더 이상 빙고나 미술 활동 같은 레크리에이션 시간에 참여할 수 없었고, 대신 뒷마당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복도를 거닐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관리자에게 필립이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으니 그룹 활동을 맡겨보면 어떻겠냐고, 그의 회복에도 도움이 되고 경력에도 의미 있는 경험이 될 수 있을 거 같아 제안했다. 마침 사람이 절실했던 시설은 주저 없이 필립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렇게 필립의 그룹이 시작되었다. 그가 이끄는 그룹은 달랐다. 정신병동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그는 각 거주인의 질환과 특징을 이해했고, 그에 따른 대처 방법도 잘 알고 있었다. 자기 보호를 위해 터득한 위기 감지 능력은 이제 타인을 지키는 데 사용되고 있었다. 위기 상황이 감지되면 그는 곧바로 관리자에게 알렸고, 불안정한 상태의 사람이 보이면 말없이 곁에 앉아 함께 있어 주었다. 참여자들은 그의 그룹에서 이상하게도 안도감을 느꼈고, 어느새 ‘필립과 있으면 안전하다’는 생각까지 들게 하게 되었다. 그는 리더로서 말보다 행동으로 신뢰를 보여주는 사람이었고, 그가 가진 통찰력은 단순히 병을 견딘 경험이 아닌, 사람을 깊이 이해하는 마음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그는 점점 시설에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거주인들과 스태프들은 그를 한 명의 직원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매점에서의 업무, 그룹 활동 운영, 위기 상황 보고까지 그의 하루는 바빠졌고, 그의 바쁜 일정 속에서 그도 모르게 방 체크 시간이 아주 조금씩 짧아져 있었다. 어느 날, 개인 세션을 진행하며, 그의 체크리스트를 살펴보던 중, 그가 조용히 말했다.

"오 마이 갓,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서 방 문을 확인하는 걸 깜빡했네요. 그게 원래 5분 걸리는 루틴이거든요."

나는 그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공감과 칭찬을 더해 말했다. 그가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다는 것을, 아주 사소한 변화 속에서도 우리는 진전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필립이 시설에 입소한 지벌써 9개월이 지났지만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강박적인 사고와 반복되는 행동은 여전히 그의 일상에 남아 있었지만, 그는 이제 스스로를 돌볼 수 있었고, 크고 작은 일도 책임지고 해낼 수 있을 만큼 회복되어 있었다. 치료팀과 필립 모두 더 낮은 단계의 보호 시설로 옮기는 것에 동의했고, 나는 그의 입소를 준비했다. 그러던 중, 필립이 조용히 물었다. "대학원은 어떻게 가요?" 그 말속에서 나는 그의 반짝이는 눈동자 너머에 자리한 희망을 보았다.


내가 경험한 강박장애 클라이언트들은 대부분 다른 정신질환을 동반하고 있거나, 강박 증상의 강도가 매우 심각한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완전한 회복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며, 일부 사례에서는 완전한 증상 소멸이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필립의 사례는 예외적이었다. 그의 사회적 역할 변화와 일상생활의 구조화된 참여는 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이는 강박 증상의 빈도와 강도가 눈에 띄게 감소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는 역할 기반 회복 모델(Role Recovery Model)의 실질적인 효과를 확인할 수 있었던 사례이기도 하다.


심리치료의 목표가 항상 증상의 완전한 제거에만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 사례는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필립과의 상담을 통해 나는 심리사회적 환경의 변화, 의미 있는 역할 수행, 그리고 현실적인 목표 설정이 정신건강 회복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너무 높지 않은 초기 목표가 작고 반복 가능한 성공 경험을 통해 자기 효능감을 높이고, 이는 장기적인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은 임상적으로 매우 중요한 통찰이었다.


또한, 집중 보호 프로그램에 있는 클라이언트들이 일상적인 생활을 연습하고 경험할 수 있는 직업 훈련 및 직업 체험의 기회가 부족하다는 현실도 이번 사례를 통해 배우게 되었다. 필립에게 제공된 소규모의 작업 기회는 일’의 차원을 넘어, 그에게 사회적 역할을 회복하고 자신의 가치를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증상의 호전뿐 아니라 정서적 안정과 자기 개념의 회복으로도 이어진 것을 확인했다. 이와 같은 회복 경험이 가능한 환경 조성이 모든 클라이언트에게 확장되길 바라며, 향후에는 보호시설 내에서도 다양한 수준의 직업 활동과 사회참여 기회가 체계적으로 제공될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과 임상적 연계가 강화되길 바란다.


직업의 특성상 클라이언트의 신원 보호는 매우 중요한 윤리 원칙이기에,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과 상황은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하여 소개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임상적 통찰과 경험은 모두 제가 현장에서 직접 마주한 고민과 관찰에서 비롯된 것이니 이점 널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사진 출처: Pi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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