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부터 “괜찮아?”라는 질문이 불편해졌다.
괜찮지 않은데도 괜찮다고 말하는 일이 너무 자연스러워져서,
그 질문은 안부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잘 숨기고 있는지 확인하는 테스트처럼 느껴졌다.
원래 나는 버티는 사람이었다.
버틴다는 건 대단한 의지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습관에 가깝다. 버티다 보면 감정은 뒤로 밀리고, 몸은 “나중에”로 미뤄진다. 나중에는 늘 없다. 이상하게도 나중은 ‘시간이 남을 때’가 아니라 ‘사람이 남을 때’ 온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이 남기를 기다리느라 정작 사람을 다 써버린다.
그날도 비슷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불을 켰는데, 집이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시끄러웠다. 냉장고 모터 소리, 형광등의 얇은 진동, 밖에서 지나가는 차 소리까지 전부 내 머릿속으로 몰려왔다. 갑자기 알았다. 내가 조용한 게 아니라, 내가 비어 있구나.
그때 처음으로 아주 사소한 걸 했다.
거창한 결심이나 라이프스타일 변화가 아니었다. 그냥 내가 나한테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오늘은 뭐가 힘들었어?” 같은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졌다. 그런데 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늘 남의 기분은 빠르게 맞추면서, 내 기분에는 늘 늦었다. 내 마음은 내 안에 있는데도, 번역이 필요했다.
며칠 동안은 어색했다.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걸면 조금 유치해 보일까 봐, 괜히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하지만 그 어색함이 지나가자 그 다음엔 놀라움이 왔다. 내 안에 생각보다 많은 감정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들은 대단한 걸 요구하지 않았다. “좀 쉬어.”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 “지금은 인정받고 싶었구나.” 같은, 당장 할 수 있는 말들.
내가 나를 돌보는 방식은 그때부터 바뀌었다.
이전의 돌봄은 ‘문제 해결’이었다. 피곤하면 커피, 불안하면 일정 관리, 우울하면 자기계발 영상. 돌봄을 한다고 하면서도 결국 더 나아지기 위한 도구만 찾았다. 그런데 돌봄은 도구가 아니라 태도였다. 나를 고치려 들기보다, 나를 이해하려는 쪽에 가까웠다.
이해는 속도가 느리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해결을 택한다. 해결은 빨리 끝나니까. 하지만 마음은 빨리 끝나지 않는다. 마음은 납득보다 동행을 원한다. “괜찮아져야” 사랑받는 게 아니라, “괜찮지 않아도” 옆에 있어 주길 바란다. 그 옆에 있어 줄 사람은 때로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이어야 했다.
가끔 여전히 버티고 싶은 날이 있다.
그럴 땐 버티는 대신 아주 작은 약속을 한다.
물을 한 컵 마시기. 커튼 열어 햇빛 보기. 휴대폰 내려놓고 10분만 멍때리기. 누군가에게 “오늘 좀 힘들어”라고 말해보기. 이런 약속들은 인생을 바꾸진 않지만, 하루를 구해낸다. 하루가 구해지면, 삶이 조금씩 복구된다.
이제 누가 “괜찮아?”라고 물으면 예전처럼 자동으로 “괜찮아”라고 말하지 못한다.
대신 이렇게 대답해 보려 한다.
“완전 괜찮진 않은데, 그래도 괜찮아지려고 해.”
이 말은 약해 보이지만, 나한테는 꽤 용감한 문장이다. 적어도 나는 더 이상 나를 혼자 두지 않기로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