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자훈 Aug 11. 2024

봄, 사색의 길

2022년 봄의 선암사, 송광사 그리고 불일암

선암사에 버스가 멈춰 선다. 입장권을 파는 매표소의 지붕 위를 이끼가 두껍게 덮고 있고 그 위에 지난가을에 떨어진 낙엽이 한가롭다. 계곡에 걸쳐진 아치교가 높이 보인다. 우르르 계곡으로 내려간 이들의 사진 속에 담긴 정자를 품은 아치교가 아름답다. 경내에 들어선 길손들이 화장실을 찾아 우우 돌아다닌다. 용변을 보고 싶은 이들 1과 두 가지의 유명세에 함께 하고 싶은 이들 9가 있다. 첫 번 유명세는 선암사의 해우소에서 볼일을 보면 내일 아침에 바닥에 떨어지는 똥 소리가 날 정도로 깊다는 풍문이고, 둘째 유명세는 해우소 입구 나무 벽에 걸린 정호승 시인의 글이다. ‘눈물이 나면...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고 시인은 조용히 권하는데 통곡할 일이 가득한 이들이 이렇게도 많은가. 매화꽃은 막 피기 시작했다. 사람이 꽃잎만큼이나 가득해도 눈 감고 가만히 있으면 비 온 뒤에 산허리로 올라가는 구름처럼 향기가 피어오른다. 향기가 절 내밀한 곳까지 덮는다. 바야흐로 봄이 오고 있다. 향기. 그 하나로 계절이 바뀐다. 겨울이 또 다른 겨울을 위해 매화향을 갈무리하여 땅속에 숨겨 놓은 듯하다. 노자 든든하겠다.  

   



송광사로 향하는 산길에는 이제 막 연초록 잎을 내미는 나무들이 겨울의 잔재를 가진 채 그대로 하늘로 뻗치고 있다. 신기하다. 산새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새소리조차 없는 계곡에는 바람 소리만 가득하다. 스님들이 조용히 걸으시던 길임을 미물들도 알고 있나 보다. 노스님의 느린 한 걸음 한 걸음의 침묵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산의 배려인가. 침묵으로 채워져 혼자 걷기 딱 좋은 길이다. 이 산길은 선암사와 송광사를 오가던 스님들의 길. 산을 오를수록 나목이 늘어나고 숲길은 조용하다. 새벽 일찍 출발하여 시작한 산행에 힘이 부친다.  선운사는 조계산 동쪽 기슭에 있고, 송광사는 그 서쪽에 자리 잡고 있으니 산길 어디에 선가는 분명 경계가 있을 터이고 그곳은 산마루이겠지 생각하며 걷는 사이에 선운사~송광사 길의 가장 가파른 계단 앞에 이르렀다. 새벽 해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 했던가. 혼자 온 여인네가 바로 그곳에서 돌아가겠다며 행장을 돌린다. 그분은 아내와 내가 새벽부터 시작된 일정으로 산행이 힘들 즈음 산길에서 만난 일행이다. 우리도 초행인지라 앞서가는 우리의 확신 없는 모습이 불안했던지 마지막 등성이를 오르는 계단 앞에서 되돌아가겠는 것이다. 조금만 더 가보자고 설득했다. 그렇게 가파른 계단 길 끝에 올라서자, 송광사를 품고 있는 산자락이 좌라락 눈앞에 펼쳐졌다. 그냥 돌아갔으면 어쩔뻔하였나. 지금부터 내리 내리막길인 것을. 우리는 그 유명한 보리밥집을 우회하기로 한다. 조금 더 일찍 송광사에 도착하여 불일암을 방문하기 위함이다. 송광사로 내려가는 하산길은 계곡 물소리가 동행해 주었다.  송광사 석축에 기대선 늙은 산수유나무는 몸체의 그 숱한 상처에도 온전히 노란 꽃을 피워냈다.     

 



여기는 불일암.

 댕그랑 댕그랑 풍경이 운다. 바람이 다니는 길에 매달린 풍경이 바람에 제 소리를 실어 보낸다. 대밭으로 난 오솔길에 들어선 바람결에 댓잎 스치는 소리가 난다. 그 길가에 눈처럼 하얀 꽃을 피운 매화 향기가 맴돈다. 가만히 앉아서 그 소리를 듣고, 그 향기에 묻혀 있다. 손으로 만든 까닭에 앉으면 부서질 것 같은 구불구불한 나무의자 하나가 졸고 있다. 주인은 손때 묻혀놓고 바람 따라 하늘로 떠났다. 그이가 남긴 뜻을 기리는 재단의 브로셔가 의자 위 바구니에 담겨 길손을 맞는다.


봄을 이끌고 오는 매화 맞이 길이었다. 서울에서 버스로 4시간, 산행 6시간. 이 시간에 비하면 매화감상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짧았다. 그러나 시공간에서의 불균형이 큰 만큼 마음의 평화가 깊어지는가. 

주인 떠난 산사의 고요는 오랜 시간이 공들여 쌓아 놓은 평화였다.   

   

불일암 나무의자




선암사

                                                            정호승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화장실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작가의 이전글 운주사 벚나무 아래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