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선조님이 만들어 후손에게 준 보물
‘전·함典函: 깨달음을 담다'
리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고려시대 불교 경전을 붓으로 직접 필사한 경전과 그것을 보관하기 위해 만든 상자인 경함을 집중 조명하는 전시회이다.
“수만 개의 나전 조각을 세밀하게 다듬고 이어 붙여 다양한 꽃문양으로 경함 표면을 가득 충전하고(중략) 예술성과 기능성을 겸비한 고려 공예의 진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螺鈿菊唐草文 經函
어려운 단어들이다. 그래서 자세히 살펴봤다. 나전은 전복 속껍질인 자개 조각을 칠기나 목지에 여러 형상으로 박아 붙여 장식한 것을 말하고, 국(菊)은 꽃의 모양이 국화임을 말한다. 당초문(唐草文)은 ’ 당풍 또는 이국풍의 덩굴이란 뜻으로 식물의 형태를 일정한 형식으로 도안화한 장식무늬’를 뜻하는데 우리나라 고미술품에서 흔치 않게 볼 수 있는 꽃 모양이다. 경함은 필사한 경전 보관용 함이다.
그런데 오늘 ‘나전국당초문 경함’과의 조우는 뜻하지 않은 큰 행운이었다. ‘아티스트 웨이, 마음의 소리를 듣는 시간’이란 책에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흥미 있거나 관심 가는 무언가를 혼자 해봄으로써 감각을 깨우는 것을 ‘아티스트 데이트’라 명하고 ‘예술’과 ‘만남’이 핵심이라 일러주었다. 특별한 일정이 없던 차에 이 경함이 전시되는 사실을 모른 채 리움미술관에 간 것이었다.
온화한 바람으로 겨울 외투 지퍼를 열어둔 채로 한남동으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한가한 일요일의 도심을 거침없이 달린 버스는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나를 미술관 앞에 내려주고 제 길로 떠났다. 미술관 외부는 공사로 어지럽고, 미술관은 개관전이다.
밖으로 나와 커피 한잔할 장소를 찾다가 한 좁은 골목에 이끌려 들어갔다.
‘Not Bad Coffee’
중앙에 위로 오르는 계단이 있고 그 좌우에 매끈한 구조물이 있는 건물의 입구에 세워진 입간판에 호기심이 일었다. 커피집이다. 깔끔한 서울 아가씨 같은 찻집에는 에스프레소 커피가 없다. 물을 반만 넣은 아메리카노를 들고 2층에 있는 전시장을 돌아보고, 좁은 골목을 되돌아 나오며 커피를 조금씩 마신다. 좋은 커피다. 우연히 마주친 현대식 세련된 건물에서 개성이 넘치는 그림전(WHAT EVER WE WANT-INAP ARCHIEV)을 보고 커피까지 맛나다니, 오늘의 현대 서울이 제법 매력 있다.
골목 찻집에서 리움미술관까지는 몇백 걸음 남짓인데, 현대적 찻집과 미술관 사이 어딘가에 마법 같은 시간의 벽이 있었다. 미술관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그 벽이 허물어지면서 천이백여 년을 거슬러 오른 나는 고려시대에 있다. 인간의 위대한 의지로 만들어진 예술과 종교의 결합, 시간의 흐름을 잊은 듯한 심연의 고요가 내 앞에 나타났다.
경함과 필사본만 오롯이 있는 전시장에는 오랜 세월이 몰고 온 침묵이 묵직하게 고여있다. 침묵에 압도된 나는 유물의 세밀함을 따라가지 못하고 유물 앞에 그저 우두커니 서 있다.
경함(經函) 앞에서 도란대는 중년 여성의 대화가 방음벽에 흡수되어 나지막하게 시간에 묻어 오른다. 이런 도란거림은 산새의 속삭임 같다. 내가 산새의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저들의 대화를 알 수 없어서 그들의 대화가 새소리처럼 들렸나 보다. 그들은 곧 그곳을 떠났다. 나전국당초문 경함은 다시 조용한 침묵으로 돌아갔고, 나는 침묵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침묵을 보는 게 아니라 침묵이 나를 지긋이 보는 듯하다. 아득한 후손을 호기심 가득한 장난꾸러기 얼굴로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묻는듯하다.
‘내 마음의 장난이지’
기차역에 기차가, 사람이 들어오고 나가듯 젊은 쌍이 경함 앞에 서고, 또 다른 군상이 들어와 저마다의 생각으로 경함을 마주한다. 1,200여 년 세월 동안 이어진 인간의 왕래. DNA로 전승되는 인류의 분합. 무기물로서 경함은 변할 수 없으나 유한 생명인 인간은 변화해 왔을 터이다. 경함은 시간을 유지하고, 인간은 시간에 따라 변화해 왔다. 생명에게 변화는 삶을 이어가는 방안이기 때문이다.
다시 조용하다. 전시장 벽은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고 경전과 경함만 밝은 빛 아래 있다. 움직이지 않고 서 있던 나는 검은 벽에서 나온 시간이 경전과 경함 쪽으로 길게 흐르는 듯이 느낀다. 내 몸을 관통하는 긴 시간. 심장이 조용히 뛴다.
작은 메모지에 글을 쓰는 소리가 침묵을 깨울까 염려되면서도 그 소리가 좋다. 아무도 없을 때는 펜의 사각대는 소리가 제법 커지다가, 다시 누군가가 이 걸작 앞으로 걸음을 옮기고 그들끼리 속삭이면, 깊은 산속의 새가 사람 걸음에 놀라 움직임과 노래를 숨기듯 펜과 종이의 마찰음이 노트 속으로 스며든다. 소리가 노트에서 나왔다가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가는, 우리가 땅에서 나왔다가 땅으로 스며들 듯이. 우리가 땅으로 돌아가면 작은 무덤이 남듯이, 소리가 종이 속으로 숨어든 후 생각의 흔적이 종이 위에 남는다. 사각사각 소리가 나와 경함과 검은 벽 사이의 시간 흐름에 합류한다. 지금, 이 순간도 시간 흐름의 한 자락이므로.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을 나이인가? 혼자 있어도 이젠 어색하지도, 다른 이의 눈치가 보이지도 않는다. 혼자 있지만 혼자가 아닌 듯한 느낌. 이유는 그리 거창하지 않다. 이런 느낌을 종이에 스며든 글로 나눌 수 있다는 생각. 쓴다는 게, 종이에 글을 쓴다는 게 좋다. 이러고 있는 내 모습을 누군가 보아 주었으면.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있었으면.
‘나는 관심받기를 바라는 관종이다.’
오전 한때가 지났다. 미술관 문을 나오자, 현실의 찬 공기가 훅 밀려온다. 공사장 망치 소리, 차 소리와 강아지 짖는 소리. 지나는 이들의 웃음소리. 삶의 소리이다. 그 소리를 바람 소리가 덮는다. 태초의 시간부터 존재해 온 심연의 소리. 햇살이, 밝은 햇살이 포근하다. 깊은 바닷속을 거닐다가 그 햇볕 따라 수면 위로 머리를 내민 듯 마음이 고요하다.
삶이 ‘살 만하지?’라고 내게 말을 걸어온다.
이제 햇볕이 떨어져 부서지는 길을 걸어가 존재의 공간으로 돌아올 시간. 한마디의 시간이 다른 색으로 채워졌다.
짜장면집에는 전화벨 소리, 식기 부딪치는 소리, 작은 재즈 음악 그리고 나그네의 배고픈 소리가 짜장면 고소한 향기에 묻히는 동안, 내가 나에게 보낸 첫 데이트가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