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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자훈 Dec 10. 2024

익숙한 이와 낯선 곳

익숙한 이와 함께 걷다 만나는 낯선 풍경의 행복








가을이 깊어졌다.

지난여름의 무덥고 긴 더위 때문인지 산과 들의 단풍이 예전 같지 못하다는 말을 주변에서 자주 듣는다.  

  



도봉산 신선대

11월 첫 일요일에 아내와 도봉산에 간다.

산행을 시작하여 채 한 시간도 되기 전에 만월사에 도착한다.

그곳에 올라올 때까지는 그저 그런 단풍만 보이는 올해의 평범한 가을산이었다.

우리는 산바람 냄새를 풍기는 주지스님이 끓여낸 차를 한잔 하며 저 멀리 도심을 내려다보다가, 땀이 식기 전에 신선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몇 걸음 오르자 곧 걸음이 더뎌지고 마침내 멈출 수밖에 없다.

파란 하늘 속에  붉거나 노란 단풍이 하얗게 빛나는 거대한 신선대를 배경으로 가을엽서처럼 담겨 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시간을 잊고 있었다.    

남산 산책길


11월 마지막 일요일에 서울의 구도심이 보이는 남산 서측의 넓은 산책로에 간다.

연세 드신 분들이 걷는 산책로를 우리는 달린다.

몇 개의 언덕길을 오르내리고 단풍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길을 마주한다.

맑은 햇볕이 통과한 단풍의 투명한 붉은색이라니.

만추의 그림을 꼭 닮은 고운 단풍이 달리는 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11월 마지막 목요일. 간밤에 첫눈이 내렸다.

첫눈으로는 유례 드물게 많이 내린 눈에  어제까지도 노란 단풍을 곱게 달고 있던 아파트 정문의 살구나무가 하얗게 새 단장하였다.

눈으로 오히려 한가해진 도심길의 버스는 막힘없이 한강을 건너고, 남산터널을 지나 종로에 들어선다.

목요일 아침마다 타는 140번 버스.      

버스에서 책을 읽는 동안 친구에게서 온 카톡 메시지가 여러 개 쌓였다.


‘좋은 아침~~ 눈 엄청, 아주 엄청나게 오네’

‘서울 얘기다. 혜화동^^’

‘거의 폭설 수준이다~~ 피 뽑으러 왔다.’     


혜화동!! 그곳이면 지금 내가 탄 버스가 그 길을 지나는데?    

 

‘석기님, 차 한잔 같이하고 가’

‘맑고 향기롭게 가는 중~~’

‘시간 되면 기다려. 15분 이내에 갈게’     


‘안돼~~’     


‘가야 돼?’     


‘나 가야 해~~  오늘 평가받는 날이야. 아쉽. 아주 마니~~’   

  

‘아쉽. 운전조심’     


바로 그때 버스에서 안내방송이 나온다.

‘이번 역은 혜화역입니다. 다음 역은 마로니에 공원입니다.’


얼른 책을 가방에 넣고 하차 버튼을 누르고 차가 서기도 전에 뒷문 앞에 섰다.

전화를 손에 잡고 눈 덮인 인도에 내려서는 내 눈에 전화를 든 친구가 찻집을 나서며 두리번거리고 있다.   

   

친구는 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생각했단다.

친구가 온다는데 뭐가 그리 급한 게 있다고 가야 한다고 했을까? 까짓 평가가 뭔 수라고.

평생 평가받으며 살았는데 아직도 이리 쫓기며 살아야 해?     톡을 한다.


‘갑자기 친구 온다는 데 간다 하니 슬프다~~ 그것도 많이 엉엉엉’     


혼자 자책하는 중에 친구가 나타나자    

 

‘눈꽃 녹듯 슬픈 마음이 사라졌다.

환한 웃음과 함께 친구가 왔다.

어찌 이런 일이’     




독서동아리 단톡방에 눈을 인 마로니에(칠엽수) 사진을 붙여 글을 올린다.         

마로니에공원, 첫눈, 칠엽수



‘이 아침에     

이 공원에서     

친구를 만났어요     

마로니에 공원    

      

나는 버스 타고 가는 길     

그 친구는 진료 가는 길     

가는 길은 달랐는데     

마음은 한 길     


가슴이 좀

따뜻해졌습니다.’









 첫눈 온 11월 마지막 목요일.

'맑고 향기롭게’ 반찬 조리장이다.

점심시간이 되어서 하던 일 멈추고 담장을 맞대고 있는 길상사 공양간으로 간다.

일주문 지나 정면 언덕에 있던 꽃무릇 파란 잎이 눈에 덮여있다.

 첫눈에 놀라 떨어진 단풍잎은 그 눈 위를 덮었다.              

길상사, 단풍, 꽃무릇



저 붉은 단풍잎 아래          


저 하얀 눈 아래          


푸른 잎   

       

꽃무릇이     

     

붉은 꿈을 꾸고 있다








익숙한 이와 뜻하지 않은 낯선 풍경을 보았고, 뜻밖의 장소에서 익숙한 이를 만나는 기쁨의 행운을 누렸다. 이런 행운을 누린 나는

 단풍이 여름더위에 지쳐 말라버려 아쉽다고 말하는 이를 만나면

그냥 빙그레 웃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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