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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자훈 Oct 29. 2024

꽃향유에게

꽃향유는 몸에서 향기나 나는 우리나라 자생 식물이다

꽃향유에게     


우리가 살면서 그냥 숨 쉬듯이 자연스레 만나는 것들이 있다. 눈을 뜨면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들이 그렇고, 집을 나서면 아파트 정문을 지키고 있는 느티나무가 그렇고, 나를 실어 나르는 전철과 버스가 그렇다. 우리 산하에 사는 나무와 풀 중에서 어디선가 봤을 그러나 관심 없이 그냥 지나친 것들도 많다.      

그중에서 오늘 특별히 내게 다가온 것은 ‘꽃향유’이다. 


길쭉한 대롱에 보랏빛의 솜뭉치 같은 꽃을 달고 있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꽃. 우리나라 들에서 마주치면 그냥 그 자리에 늘 있을 것 같은 작고 옹종종한 풀. 오늘처럼 가을이 깊어지는 날에 만날 수 있는 들꽃은 쌉싸름한 향기를 풍기는 제철을 만난 국화류가 있고,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하여 어디서나 자라는 서양등골나물같은 외래종 정도가 있을뿐인데 ‘우리 땅에서 자라는 자생 식물로서 앙증맞은 체구에 짙은 보라색 꽃이 다소 비현실적으로 크게 피어, 수십여 포기가 군락을 이루면 마치 그 자리에 보랏빛 융단이 깔린 것만 같다.’라고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에서 소개하는 꽃이  꽃향유이다. 보랏빛 꽃을 이 즈음에 피운다는 책 속의 사진을 보며 어딘지 모르게  친숙하다고 느낀다.      


몸에서 특유의 레몬향이 난다니, 식물이 풍기는 향기를 진심으로 대하는 나의 관심을 자극한다. 조선시대에 발행된 거의 모든 의서에서 중요한 식물로 등장하고 그 당시에는 ‘노야기’라고도 불렸단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뒤졌다. 


꽃 한 송이가 클로즈업되어 있고 잎사귀 특징이 보이는 구도가 간단한 사진을 찾았다. 잎과 줄기는 비교적 평범하여 특별한 것이 없는데, 긴 방망이 형태의 꽃대에 보송보송한 꽃송이를 단 꽃은 그리기가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그 속에 벌 한 마리가 꿀을 빨고 있다.      


가만히 바라보다 4B 연필을 들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그냥 스쳐 지나는 그냥 그런 풀이었던 꽃향유가 요술 방망이를 내게 휘두른 듯 마음속에 특별하게 자리 잡는다. 

사각사각 연필 소리와 함께 시간이 조용히 지나간다.     


책을 함께 읽는 이들의 단톡방에 책에서 인용한 글에 막 완성한 그림 붙여 올렸다. 곧바로 청계산에서 찍었다는  꽃향유의 사진이 올라왔다. 

‘청계산 어디에서 찍었나요?’

‘청계산 00사 입구의 지하도를 지나서 주말농장 쪽으로 쭉쭉 올라가면 있더라고요. 벌써 보름이 다 되었으니, 꽃이 졌을 거예요’


친구가 팬플루트 연습 발표를 한다고 버스킹 장비를 가져오라 한다. 월요일 업무회의를 급히 마무리하고 그의 사무실 옆 잔디밭에 장비를 설치해 준다. 외관이 동그라미로 가득한 건물의 17층 옥상 잔디밭이다. 그들의 연습 연주를 듣고, 친구에게 등 떠밀려 독도리나(한국형 오카리나)로 ‘첨밀밀’을 연주했다. 그들이 싸 온 점심을 함께 즐겼다. 


‘나 갈 곳이 있어’

‘어딜?’

‘그냥’

꽃이 정말로 졌으면 어쩔까 조바심이 가득한  내 마음은 벌써 전에 청계산 주말농장을 향하고 있다. 꽃향유를 봤다는 곳이다. 가을 햇볕이 투명하다. 


관심은 관심을 가지는 모든 대상에게 측은지심을 낳는다. 어떻게 여름의 그 긴 무더위를 견뎠을까? 가을이 깊어지는 이때에서야 꽃을 피울까? 내년에 새싹을 틔울 씨앗은 마련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청계산으로 간다.  


주말농장이 끝나는 곳에 차를 세운다. 올해 그리 귀하다는 배추가 싱싱하니 가을햇볕에 반짝인다. 산이 시작되자 곧 바로 세계적으로 손꼽는 녹화 성공 사례로 드물다는 우리 산의 신갈나무와 메타세콰이아가 큰 키를 자랑한다. 그 숲에서 나는 직박구리와 새들의 지저귐이 다정스럽다.      


숲길을 따라 내려온 계곡에는 건기답게 작은 물길만 남은 개천이 이어지고 있다. 개천의 중앙에는 지난여름 큰물이 좌우로 갈라 지나가며 자갈이 섞인 모래톱을 만들어 놓았다. 이곳을 풀이 차지하였다


그사이에 보라색 꽃이 보인다. 눈에 금방 띄어 찾기가 쉬웠다. 꽃이 귀한 계절에 보라색 꽃이 무리 지어 있었으니까....

잎사귀를 손에 들고 보듬다가 코를 대고 깊이 숨을 들이 쉰다. 



그림자 길어지는 가을숲에 

씨앗 떨어지는 소리 소란한데     

꽃향유


서두르지도, 애달프지도 않다

꽃과 향기가 있으니     


옹종종 모여 우리는

함께 보랏빛 꽃을 피워야 해

늦은 벌이 찾아올 거야     


손으로 보듬은 잎사귀 향기 낯설어

무슨 향이냐고 물으니

그냥 꽃향유 향기라 한다     


산그림자 발밑까지 내려오는데

눈에 남은 보라꽃 잔영이

손에 남은 잎사귀 잔향이 

귀갓길을 길게 따라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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