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밟고 18화
"엉? 술을 판다고?"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이건…"
하지만 동생 태오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수화기 너머로 엄마와 태오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가 술집에서 일한대, 엄마."
"뭔 소리야? 저리 비켜 봐, 전화기 이리 줘!"
"엄마, 그게 아니라 맥주만 팔아요. 여긴 마트에서 술을 못 팔아서... 따로 팔거든요."
"맥주? 그게 술 아니냐?"
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겪어보지 않은 일,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을 납득시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름의 병가가 끝났다.
수잔은 끝내 지훈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폐차를 위해 정비소에 들렀을 때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마트에 갈 때면 괜히 오래 머물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덜컥 겁이 났던 순간, 그가 옆에 있어준 것이 고마우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했다.
신세를 졌다는 감정이 그녀를 한동안 붙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이 다시 시작되자 그의 얼굴도, 눈빛도, 점점 흐릿해졌다.
레스토랑의 디시워셔 자리는 다른 누군가로 채워졌고, 수잔은 카지노 옆 리쿼스토어에서 일하게 되었다.
사장은 팁이 쏠쏠하다고 했다. 몸도 그리 많이 쓰지 않아도 된다고,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곳은 ‘리쿼스토어’라기엔 어정쩡한 곳이었다.
맥주만 팔았고, 오후 다섯 시부터 새벽 두 시까지 정해진 시간 동안 문을 열었다.
낮에는 한산했지만, 마감이 되면 바와 카지노에서 밀려든 손님들로 북적였다.
실내는 으슬으슬했고, 맥주 박스는 무거웠지만, 꼬리 한 알코올 냄새가 시큼 거리며 코끝에 붙는 걸 제외하면 크게 힘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취한 손님들의 혀 꼬인 영어,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맥주 브랜드들은 그 무엇보다 넘기 힘든 도전이었다.
“@#@#@…”
눈동자가 취한 듯 마구 흔들렸다.
어떤 손님들은 그녀를 이해했지만, 또 어떤 이들은 짜증 섞인 욕을 쏟아냈다.
그럴 때마다 쏘리를 외칠 수 없었고 때론 어깨를 으쓱하고 넘기는 법도 익혀야 했다.
함께 일하는 다섯 남자. 이십 대 중후반부터 삼십 대 초반의, 장난스럽게 보이던 그들.
그들은 그녀를 환영하지 않았다.
어떤 날은 냉장고 안 재고를 점검하라고 하거나, 손님들이 가져온 빈 맥주병을 정리하라는 지시를 은근슬쩍 떠넘겼다.
수잔은 그들과 부딪히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사교를 위한 자리는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폴이 그녀를 따로 불렀다.
재고와 매출이 맞지 않는다며, 혹시 아는 게 있냐고 물었다.
그 순간, 수잔은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마감 무렵, 밀려드는 손님들과의 전쟁이 끝나면, 그들은 정산을 하고 팁을 나눴다.
항상 그들의 손을 거쳐 그녀에게 전달되는 현금.
처음엔 고맙고 어리둥절했다. 팁은 익숙하지 않은 문화였다. 내가 받으면 좋고, 줘야 할 때는 왠지 찜찜한. 이곳에선 하루의 팁이 50달러를 넘을 때도 있었고, 하키팀 경기가 있거나, 연휴에는 100달러가 넘은 적도 있었다. 설거지를 할 때도 주방과 홀이 팁을 나눠 가지긴 했지만, 지금의 액수와 비교할 수 없이 작았다.
하지만 어느 날, 수잔은 그들이 현금을 슬쩍 주머니에 넣는 걸 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눈을 찡긋했다. 그 순간, 이상하리 만큼 많던 팁의 출처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그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너무 늦었고, 이미 그녀도 그 일부가 되어 있었으니까.
수잔은 폴에게 조금 미안했지만 입을 다물었다.
폴과의 대화를 마치고 돌아오는 수잔을 동료 중 한 명이 붙잡았다.
그의 눈빛은 평소보다 진지했고, 조심스러웠다.
“아무 말 안 했지?”
수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도 아무렇지 않게 잘 살아가는 세상인데...
그런 생각이 스치자, 고등학교 때의 쪽지 시험이 떠올랐다.
예고 없이 치러진 시험에 반 전체에 커닝 페이퍼가 돌았던 날,
자신만 틀린 개수만큼 손바닥을 맞았었다.
그땐 억울함보다도, 자신만 배제되었다는 느낌으로 오래도록 씁쓸했었다.
이번 일도 그랬다.
어쩌면 자신이 알기 훨씬 전부터, 그들만의
방식대로 은밀히 모든 것이 짜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은 그 틈에 어쩌다 끼어든, 이름도 없는 조각 하나였을 뿐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의심하거나 고발하는 데 드는 에너지보다, 침묵이 훨씬 더 편해 보였다.
괜히 뭔가를 말해서 그들과 다툼이 생기면 다시 설거지통 앞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더욱더 입은 굳게 닫혔다. 그들 모두를 적으로 만드는 일, 그건 정말 반갑지 않을 것이었다.
수잔은 긴 한숨을 뱉었다.
무엇을 해도 뾰족한 출구는 없어 보였다.
진실은 늘 손쉬운 방향으로 밀려나고, 사람은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도덕적이다.
예전의 그녀라면 타협했을까?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한때 그토록 힘들었던 그 이율배반에 몸을 숨긴 채 하루를 삼켰다.
오늘 밤, 그녀는 자신을 덮친 이 어둠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멀리 밀어내려 애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