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밟고 17화
딸칵,
어디선가 시작된 소리,
복도를 오가고, 문이 닫히는 나른한 아침.
잠결을 적시는 포근한 커피 향에
수잔은 숨을 들이키며 천천히 눈을 떴다.
낯선 천장... 잠시 생각이 멈췄다. 이곳이 모텔임이 떠오르자 , 수잔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지훈의 자리를 찾았다.
소파베드는 말끔히 접혀 있었고, 그가 머물렀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탁자 위에 놓인 뚜껑 덮인 머그잔, 곱게 포장된 모닝빵.
그것들이 아니었다면, 그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 같았다.
수잔은 코트도 벗지 않은 채 그대로 잠들었었다.
새삼스레 부끄러웠지만,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다.
창가에 다가가 커튼을 젖히자,
밤새 깔렸던 어둠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눈부신 설국이 펼쳐져 있었다.
햇살이 스며든 유리창,
그 틈 사이로 사람들은 분주히 차 위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길을 치우고 있었다.
문득, 폭우로 집이 잠겼던 날이 떠올랐다.
눈도 마찬가지였다.
겉으로는 평화롭고 아름답지만,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한 무자비함이 있었다.
자연은 늘 무심한 얼굴로 , 조금의 주저도 없이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오늘 아침은 어딘가 달랐다.
누군가의 존재가 주는 안도감.
지훈이 곁에 있어 다행이었다.
그때, 몸에 묻은 눈을 털며 그가 들어왔다.
부츠를 신고 있었지만, 코트 자락은 젖어 있었다.
“잘 잤어요? 차는 견인해 갔어요. 폐차시켜야 할 거예요. 그래도 빨리 와 줘서 다행이에요.”
“고마워요. 제가... 돈은 낼게요.”
수잔은 순간 입술을 살짝 깨물며 후회했다.
바보같이, 왜 하필 ‘돈’ 이야기인가.
“보험 처리하면 돼요.
일단 차는 저희 정비소로 보냈어요.
걱정하지 마요.”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식사는? 제가 살게요.”
이런, 하나같이 어색한 말들.
이럴 때 해야 할 말이 따로 있는 걸까?
연습이라도 해뒀어야 했던 걸까.
“먼저 먹었어요.”
지훈은 탁자 위에 놓인 커피와 모닝빵을 수잔 앞으로 밀어놓았다.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어젯밤의 잿빛 하늘을 닮아 있었다.
“날씨가 또 변하기 전에 출발하죠.
여기선 뉴스보다 일기예보가 더 중요해요.”
수잔은 ‘미안해요’라는 말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를 만난 후 줄곧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은
‘고마워요’뿐이었다. 그 뒤에 ‘미안해요’를 붙이는 게 과연 맞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을 오해한 것에 대한 사과인지,
아니면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막연한 미안함인지,
어느 쪽이든, 그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잠시 후, 그는 자신의 차 조수석 문을 열었다.
수잔은 주춤하다가, 조용히 몸을 실었다.
그가 수잔의 어깨너머로 손을 뻗어 안전벨트를 채워주자, 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지훈의 시선은 젖은 도로에 고정되어 있었고,
수잔은 그의 핸들을 움켜쥔 손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모든 것이, 꿈속의 장면처럼 느껴졌다.
말 없는 순간들이
마치 오래된 무성영화처럼 흘러갔다.
말을 하면, 왠지 지금의 고요함이 깨어질 것 같아서,
질문도, 설명도 조심스러웠다.
오직 손짓과 시선만이 오갔고,
차는 눈 덮인 도로를 달렸다.
짧은 두 시간.
지훈은 수잔을 그녀의 집 앞에 내려주었다.
“쉬어요.”
독백 같은 말을 남기고 그는 머뭇거림 없이 방향을 틀어 사라졌다.
수잔의 입술에서 나온 ‘고마워요’는 이미 저만큼 멀어진 그에게 닿지 못했다.
지훈은 수잔의 한국 이름을 부르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처음 그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죠안이 건넨 말 때문이었다.
“어떤 동양인 남자가 주고 간 팁이야.”
20달러였다.
그때는 그저 신기했다.
익명의 존재. 고단한 하루의 끝 어딘가에 ‘키다리 아저씨’가 있다는 상상은, 지친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
하지만 버스에서, 마트에서, 그리고 조심스럽게 여행을 함께 가자고 말하던 지훈이 그 ‘동양인 남자’라는 걸 깨닫는 순간, 모든 마법은 끝났다.
램프 속 지니는 정체를 드러냈고, 설렘은 경계로 바뀌었다.
아직은, 수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 이름에는 숨 막히던 고국의 기억이 붙어 있었다.
연습할 수도 없고, 이미 채점이 끝나버린 듯한 삶.
지훈은 그 고국에 매달린 사람이었기에, 그를 쳐다보면 마음 한편이 무거웠었다.
수잔은 멀어지는 그의 차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 차는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모든 장면이, 모든 순간이 갑자기 아득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외로웠다.
지훈은 차 키를 소파 위에 던지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이틀 만에 돌아온 자신의 아파트는 익숙했지만 또 공허했다. 천장 위로 시선이 멎자 수영의 잔상이 스쳤다.
등을 누르던 피로가 어깨와 온몸을 짓누르자,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수영의 이마에 번져 있던 퍼런 멍.
그 밤 내내 웅크린 채 한 번도 뒤척이지 않던 모습.
티브이 보다 더 크게 들리던 작은 숨소리.
지훈은 끝내 그녀를 바라보지 못했었다.
왜인지, 자신이 그녀를 다치게 한 것만 같은... 그 감정은 곧 자신을 향한 분노로 되돌아왔다.
그녀의 무모함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게 위험 속에서도 혼자일 수밖에 없던 그녀의 현실이 그를 흔들었다.
지훈은 생각했다.
어쩌면, 그 상황까지 몰고 간 게 자신의 조급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그는,
수영을 그만 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사실 그는, 20대와 30대에 나름대로의 연애를 했었다. 두세 번 선을 보기도 했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의 감정은 그때와는 전혀 달랐다.
마치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처럼.
그녀 앞에 완전히 내던져질 것 같은, 무너지는 느낌.
주유소에서,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를 찾아냈을 때 지훈은 무서웠다.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자신 안의 감정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이게 사랑일까?
그는 그렇게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의 사랑은 그저, 퇴근 후 따뜻한 불빛이 켜진 집,
식탁 위에 놓인 웃음소리.
그가 꿈꾼 사랑은, 40대의 어느 저녁처럼 잔잔하고 조용한 삶이었다.
하지만 수영은, 잡을 수 없는 파랑새의 깃털 같았다.
아름답고, 너무 애처로워서 손에 쥐는 순간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곁에 있으면 깨어져 버릴 듯한 사랑.
그래서 그는, 그녀를 놓기로 했다.
그날, 지훈은 수영의 이름을 지웠다.
어쩌면 지금의 선택을 언젠가는 후회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선택은 사랑이 끝났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도
사랑이 남아 있어서라고.
지훈은 수영을, 애써 기억 속에 눌러두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놓아주는 사랑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