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밟고 16화
수잔은 비상등을 켠 채 고속도로를 천천히 달렸다.
위태로운 외형의 차량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그 흘끗거림은 범퍼 아래로, 찌그러진 차체 위로 머물렀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수잔은 애써 웃었다.
괜찮다는 듯. 그들을 안심시키듯, 그리고 자신에게도 그렇게 말하듯이.
눈 속에서 차를 꺼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언덕아래에서 새어 나오는 차의 희미한 불빛에 멈춰 선 트럭 운전자의 도움의 손길, 이어 두 대의 차량이 더 멈췄고, 그들은 어둡고 추운 날씨에도 마치 오래 알던 사람처럼 수잔을 걱정하며 따뜻하게 위로했다.
원주민 정비소에서 레카를 부르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수잔은 망설였다.
사고 이후엔 보험료가 크게 오를 수도 있다는 말이 떠올랐고, 무엇보다, 그 사고의 순간을 다시 설명하는 일이 두려웠다.
그래서 차 상태가 심각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녀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아직 두세 시간은 더 가야 할 것 같았다. 차가 멀쩡했다면 거의 집에 도착했을 시간.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수잔은 한숨을 쉬었다. 그때까지, 차가 견뎌주길 바랄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주유소가 눈에 들어왔다.
적어도, 집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금은 불안한 마음이 눌러졌다. 그제야 수잔은 한숨을 내쉬며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수잔은 마을로 들어서기 전, 마지막 주유소에 딸린 작은 식당 옆에 차를 세웠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며 반쯤 얼굴을 가린 채 차에서 내렸다. 멍든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식당 안으로 들어가 커피 한 잔을 시켰다.
그저, 잠시라도 숨을 고르고 싶었다. 그 이상은 생각나지 않았다.
다시 눈이 내리려는 걸까. 구름도 없는 하늘인데,
창밖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수잔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무르며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가야 했다. 달리 다른 선택은 없었다.
그녀가 차 문을 열려던 순간,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그때,
바람이 흘렀다.
그리고, 그 바람이 그녀의 숨결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였다. 지훈.
그가, 어떻게 여기에 있을까?
수잔의 가슴이 뭉클 거리며 뜨거워졌다.
반가움과 서러움이 북받쳤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알 수 없는 분노가 맺혀있는 듯했다.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예요?”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죽고 싶어요? 이걸 끌고 고속도로를... 보험회사엔 왜 연락 안 했어요?”
그 눈을 마주치는 순간, 수잔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술이 붙어버린 듯, 그저 그 앞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수잔의 머릿속엔 수많은 질문이 맴돌았다.
그가 어떻게 이곳에 있는지, 자신을 찾아온 건지, 아니면 이 또한 우연인지.
하지만,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지훈의 화난 모습에 꾸중을 듣는 아이처럼 숨을 죽인 채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훈은 잠시 숨을 뱉으며 화를 누르려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이내, 수잔의 손을 잡고 식당 안으로 이끌었다.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그의 손은 그녀의 손을 쥐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또다시 도망쳐버릴까 봐 두려운 듯, 그 손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침묵이 흐르는 식탁 위에 토스트와 계란, 머그컵 위로
커피가 찰랑거렸다. 지훈은 그녀의 접시에서 토스트 한 조각을 집어 잼을 바르고, 다시 접시에 내려놓았다. 수영은 말없이 그의 손끝의 움직임만을 따라갔다.
지훈이 손을 뻗어 그녀의 모자를 위로 밀어 올리자, 갑작스러운 그의 손길에 수잔은 흠칫 놀라며 손으로 이마를 가렸다. 순간, 지훈의 미간이 아주 짧게 굳은 기색이 스쳤다. 그러곤 말없이 일어나 자리를 떴다. 빈 의자와 접시가 남겨진 듯 아득하게 밀려왔다. 마치 혼자 남겨진 수잔의 마음처럼.
잠시 뒤,
그가 돌아왔을 땐 손에 진통제가 들려 있었다.
약을 꺼내 그녀의 접시 위에 올리고, 컵에 물을 따르며
병원에 꼭 가보라는 그의 말에도, 고맙다는 말이 입 밖으로는 끝내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둘은 침묵 속에서 다시 마주 앉았다.
식사를 마친 뒤, 지훈은 담배를 꺼내 물고 수잔의 차 쪽으로 걸어갔다.
차를 천천히 한 바퀴 돌며 살피는 동안, 그의 얼굴엔 점점 더 깊은 주름이 잡혔다.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내며, 그는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보험”과 “레카”라는 단어만 수잔의 귀에 어렴풋이 들어왔다.
그 사이에도 눈발은 점점 굵어졌고, 어둠 속 거리는 빠르게 하얗게 덮여갔다.
“레카가 오늘은 눈 때문에 못 들어온대요. 날씨가…”
지훈은 말끝을 흐렸다.
하늘은 이미 잿빛 눈에 쌓여, 그들의 앞을 막고 있었다.
모텔은 식당 건물 옆에 붙어 있었다.
“폭설로 방이 하나밖에 없대요.”
지훈이 말했다.
수잔도 그 정도는 알아들었다. 반문할 수는 없었다.
“같이 써야 할 것 같아요.”
그는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담담했고, 설명이 필요하진 않았다.
수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감정이 아니라, 이성의 문제였다.
이미 사고로 충분히 배운 사실.
살아남는 쪽을 택해야 했다.
방은 예상보다 작고 단정했다.
창문은 잘 닫혀 있었고, 히터에선 묵직한 바람이 흐르고 있었다.
지훈은 코트를 벗어 걸고, 난방을 켜고, 티브이를 켠 후 소파에 앉았다.
수잔은 욕실로 들어가 거울에 서린 김을 손으로 닦아냈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핏기 없는 얼굴에 붙어 있었다.
붓기 시작한 눈두덩이 주변으로 멍이 번져 있었다.
누가 봐도, 힘든 하루였다는 걸 짐작하게 만드는 얼굴.
수잔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지훈은 테이블 옆에 앉아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고 있었다.
수잔은 무언가 말을 꺼내야 할 것 같았다.
입안에서만 맴돌던 말.
‘고마워요.’
몇 번을 놓친 그 말.
잠시의 침묵.
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감사의 말을 듣고 싶어서 한 행동이 아니었다.
수잔이 어색하게 침대 모퉁이에 앉자,
두 사람 사이로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일기예보 소리만 잔잔히 퍼졌다.
“괜찮아요?”
지훈이 물었다.
수잔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가 어땠는지를 묻는 거라면, ‘아니요’였겠지만
몸이 괜찮은지를 묻는 거라면, ‘네’라고 대답해야 할 것 같았다.
침대 옆 조명이 켜졌다.
방 안은 조용했고, 창밖에선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날 밤,
지훈은 오래도록 일기예보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수잔은 문 쪽에 고정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사실 여행 전, 차를 점검해 주겠다는 지훈의 전화를 그녀는 의식적으로 냉정하게 거절했었다.
어느 날부터 그녀는 드라이브스루 불빛 아래 비치는 그의 얼굴, 스피커 너머로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자신의 그림자 아래까지 따라오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어느새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게다가,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 해도 이토록 잦은 우연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결계를 깨고, 조심스럽게 쌓아 올린 그녀의 삶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오늘, 그를 다시 마주쳤을 때 밀려든 낯선 떨림.
그 감정이 정말 지훈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바로 그 순간
자신을 향해 걸어와 준 그 사람이 그저 오래 잊고 있던 안도와 그리움을 자극했을 뿐이었을까.
그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수잔은 부은 눈두덩이를 조심스럽게 눌렀다.
진통제의 기운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눈 아래 깊은 곳부터 통증이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약을 위해 몸을 일으키기엔 지훈 앞에서의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어떤 말을 더해서 이 밤이 특별해지면 안 될 것 같았다.
길 잃은 마음을 남겨둔 채,
몸은 현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반쯤 가려진 어두운 하늘은, 오늘따라 더 높고 멀게만 느껴졌다.
그들은 한 방 안에서,
서로를 보지 않은 채 밤을 지새웠다.
남겨진 꿈은,
찌그러진 은색 세단과 함께 눈발에 덮여 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