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 무스쿠리

-시간을 밟고 14화

by 금희

-사랑의 기쁨은 한순간이지만
사랑의 슬픔은 영원하죠.
당신은 아름다운 Sylvie를 위해 절 버렸고
그녀는 새로운 애인을 찾아 당신을 떠나요.
사랑의 기쁨은 잠시 머물지만,
사랑의 슬픔은 평생을 함께 해요.
초원을 흐르는 저 시냇물을 향해
이 물이 끝없이 흐르는 한
당신을 사랑하리라고 Sylvie는 말했었죠.
물은 아직도 흐르는데 그녀는 변했어요.
사랑의 기쁨은 한순간이지만,
사랑의 슬픔은 영원히 남지요. -


가파른 눈 덮인 언덕 아래,
두 전신주 사이에 찌그러진 은빛 세단이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때 반짝이던 자유를 향한 기대는,

차디찬 금속의 주름 아래 조용히 사라져 있었다.


연기가 잦아들자 추위가 몰려왔다. 마구 떨려오는 공포를 가누려 애쓰며 수잔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새벽 세 시.

불빛도, 지나가는 차도 없었다.

세상은 완벽한 고요에 잠겨 있었다.


수잔은 무릎까지 잠기는 눈을 헤치며 다시 차로 향했다. 몸을 녹일 곳이 절실했다.


휴대폰은 어디로 꼬꾸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찾는다 한들, 생명의 위협이 사라진 지금, 누군가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린다는 것은 , 그저 자신의

무모함을 알리는 일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수잔은 그 부끄러움을 자초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도대체 누구에게 연락을 한단 말인가. 마리아? 폴?

... 경찰?, 스탑사인을 무시하고 과속까지 한 상황, 수잔은 고개를 저었다.


새삼, 폴이 챙겨준 부츠와 담요가 고마웠다.

담요를 꺼내 몸을 감싸자 비로소 현실이 윤곽을 드러냈다.


수잔은 라이트를 켜고, 치지직 거리는 라디오는 포기하며, 오래된 테이프의 볼륨을 최대로 높였다.

누군가 지나가 주길 기다리며.


나나 무스쿠리의 〈사랑의 기쁨〉,

이국의 언어로 , 뜻을 몰라 더 슬펐던 노래.


이 순간에, 이 노래라니.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어둠과 슬프고 청아한 그녀의 노래가 묘하게 어울렸다.


히터가 작동하면서 차 안은 따뜻해졌다.
그제야 왼쪽 눈두덩이의 통증이 스며들었다.
손끝으로 이마를 더듬자 불룩하게 부은 자리가 손에 닿았다. 피는 나지 않았지만, 그 상처는 오늘의 사고가 얼마나 위험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신에게 감사해야 할까?
아니면,
혼자 떠난 여행을 무자비하게 가로막은 신을 원망해야 할까?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수잔은 문득 알 수 없는 이율배반의 마음에 사로잡혔다.
한 번쯤은... 눈감아줘도 괜찮았을 텐데.
그조차 허락하지 않는 삶이, 그녀에겐 너무 야박했다.

첫 기억은, 항상 아렸다. 철길 너머 술빵을 이고 행상 나간 엄마를 기다리며 , 어린 수잔은 어둠 속 골목 귀퉁이에서 모래를 만지며 앉아 있었다.
아이들이 골목을 떠난 후에도, 그녀는 발갛게 달아오른 해가 어둠에 가라앉을 때에도, 오랫동안 그 빈 골목에 남았다.


어느 날도, 어느 누구도 수잔을 불러준 적이 없었다.
지친 아이는 울음을 삼키며,
작은 발로 혼자 집을 향해 걸었다.

나이가 들어서야,
그것이 모래가 아니라 공사장에서 쓰다 버린 시멘트 가루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쩌면 실체가 희미해진 허상을 기억이라 믿으며
붙들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더 아팠다.

아침이 오면,
누군가는 이 길을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자신을
발견해 줄지도 몰랐다.
수잔은 조용히 몸을 웅크렸다.
작은 새처럼... 이 밤 동안만이라도, 잠시 그렇게
자신의 지친 몸을 누이고 싶었다.

어쩌면, 아무도 찾아주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지금은, 이대로도 괜찮은 것 같았다.
살아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괜찮았다.

차 안의 히터가 서서히 온기를 채워올 즈음,
수잔은 뿌연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는 언덕 아래, 두 전신주 사이에 주저앉아 있었지만, 그 위로 펼쳐진 세상은 믿기지 않을 만큼 평온했다.

나무를 덮은 눈은 어둠 속에서 반짝였고, 새가 떠난 겨울 하늘, 그 빈자리엔 별들이 하나둘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차에서 피어오르던 연기가 걷히자 정적을 파고드는 찬 공기는 좀 전의 사고와는 전혀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그 무심한 고요 속에서, 마치 누군가 말없이 자신의 옆을 지켜주는 듯한 안도감에 , 수잔의 마음 한편이 조금 가라앉았다.


지훈...

지금 그가 떠오르다니.

수잔은 자신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순간 그를 떠올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바람이 눈 밭 위를 지나며 휘파람 소리를 내자
어디선가 아주 천천히, 빛의 기척이 깨어나고 있었다. 가장 어두운 새벽의 끝자락에서 수잔은 가만히 숨죽였다.


#나나 무스쿠리 사랑의 기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