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라 참깨

- 시간을 밟고 19화

by 금희

가끔 ‘바’에 맥주를 배달하러 갈 때면, 수잔은 난생처음 보는 카지노 안의 풍경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처음엔 어색하고 낯설었다.

한국의 오락실을 떠올리게 하는 요란한 기계음, 쉴 새 없이 바뀌는 스크린,

거기에 귀가 먹먹할 정도로 웅웅 울리는 조명과 음악까지. 그녀는 얼떨떨한 얼굴로 잠시 멈춰 서곤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잭팟이 터질 때마다 터져 나오는 사람들의 환호에 수잔의 마음도 조금씩 들뜨기 시작했다.


마치 ‘진짜 삶’이 거기서 반복되고 있는 것 같았다.

환호와 고뇌, 희망과 절망이 뒤엉킨 생생한 무대.

그녀에겐 그것이 " 열려라 참깨"를 외치던

알리바바의 동굴처럼, 지니의 램프를 문지르는 손끝처럼, 어딘가에 진귀한 보물과 신비가 숨어 있을 것만 같은 세계로 느껴졌다.


물론, 실상이 그렇지 않다는 걸 수잔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새 그녀는, 잠깐씩 그들 곁에 멈춰 서서 눈을 반짝이며 웃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그날도 마감 후, 수잔의 손에 50달러 팁이 쥐어졌다.

왠지 모를 묘한 충동이 그녀를 이끌었다.


팀원들이 술자리를 향해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녀도 뒤를 따랐지만, 시선은 자꾸만 옆으로 새어갔다. 눈에 들어온 건, 술이 아니라 화려하게 반짝이는 슬롯머신들이었다.
“… 구경만.”
그렇게,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카지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눈부신 조명, 어수선한 소음, 웅성이는 군중 속을 비집고 수잔은 조용히 한 슬롯머신 앞에 앉았다.

처음 두 번, 수잔의 손은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세 번째 스핀.
“띵!”, ‘띠리링!’
요란한 소리와 함께 화면이 번쩍였다.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그녀의 등 뒤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누군가가 어깨를 툭 치며 “굿 럭!”을 외쳤고,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화면 속 숫자들이 정신없이 튀었다가,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2000.
수잔은 흠칫 숨을 멈췄다.

5달러짜리 베팅 한 번에, 무려 2000달러.

한국 돈으로 약 200만 원이었다.


수잔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입가에 웃음이 번졌고,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정말, 이 돈이... 내 거야?’

그녀는 마치 누군가 '실수였어요'라며 돌려달라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황금히 돈을 움켜쥐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 안에서 알 수 없는 흥분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낯선 땅에서의 생활은 조금씩 고독으로 마르고 있었다.

사람들과는 웃으며 인사했지만, 깊은 이야기를 나눌 상대는 없었다.

가족과의 통화는 점점 짧아졌고,

설명해도 닿지 않는 감정에 지쳐 말을 아꼈다.


수잔은 일을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하루를 무사히 견뎠다는 안도와, 내일도 다를 것 없다는 허무가 한데 얽혀있었다.

그토록 바라던 영주권을 손에 쥐었건만, 정작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 그녀가, 오늘 밤 잭팟을 맞았다.

단지 돈 때문은 아니었다.

그건, 너무도 조용하고 움츠렸던 삶 속에서

오랜만에 느낀 심장의 설렘 같은 것이었다.

마치 수백 개의 심장이 동시에 뛰는 것 같은.


호기심에 이끌려 들어선 카지노.
그녀는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잊고 지냈던 짜릿한 떨림, 살아 있다는 감각.
그곳에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꿈과 욕망을 잡으려 애썼고, 수잔은 그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숨을 고르고 있었다. 감은 눈 사이로도 빛은 스며들었고, 귀엔 기계음이 날카롭게 박혔다.

그 밤, 오래도록 수잔은 길 잃은 불빛들 사이를 헤매는 자신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