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쿠버

날씨에 대한 상념

by 금희

연일 들려오는 눈 소식에 잠시 놀람과 걱정이 앞섰다.
예전 같았으면 설렘부터 느꼈을 텐데, 이제는 반가움보다 마음 한구석이 먼저 무거워진다. 눈이 쌓인 길 위를 조심스레 걷는 사람들, 미처 대비하지 못한 사고 소식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계절을 대하는 마음에도 나이가 스며든다는 사실을, 이런 순간에 문득 실감하게 된다.

한때 눈은 그저 낭만이었다. 소리가 사라진 듯 고요한 거리, 발자국이 남겨진 하얀 길, 이유 없이 들뜨던 마음. 그러나 지금의 나는 눈을 바라보며 그 뒤에 따라올 불편과 위험을 먼저 헤아린다. 설렘이 걱정으로 바뀌는 이 변화가 조금은 낯설고, 조금은 서글프다.

갑작스러운 폭설은 강원도를 제외하면 현실감 없는 이야기였다. 뉴스 속 화면으로만 존재하는, 어딘가 먼 나라의 풍경처럼 느껴졌다. 이를테면 캐나다 같은, 추위를 일상처럼 견뎌야 하는 곳에서나 가능한 일 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내가 머무는 곳이 바로 그 캐나다, 그중에서도 밴쿠버다. 하지만 이곳의 겨울은 눈보다 비로 기억된다. 몇 주째 이어지는 비는 ‘레인쿠버’라는 별명이 왜 붙었는지를 매일같이 증명한다.

눈보다 익숙한 비, 그렇다고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 종일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어느새 배경이 되고, 흐린 하늘은 하루의 시작과 끝을 모호하게 만든다. 오전 9시가 되어야 겨우 어둠이 물러나는가 싶더니, 오후 5시도 되기 전에 다시 세상이 어둑해진다. 낮과 밤의 경계가 흐려진 계절 속에서 저녁은 유난히 길고, 생각은 그 길이를 닮아 끝없이 늘어진다.

눈이 오는 날의 고요함과 달리, 비는 마음까지 적시는 듯하다. 특별히 떠올릴 일도, 분명한 감정도 없는데 괜스레 우울해진다. 이유 없는 상념들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마음 한켠에 고인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듯, 생각도 자연스레 흘러가 주기를 바라지만 쉽지 않다.

이런 날이면 시간은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지금의 나와 예전의 내가 별다른 경계 없이 겹쳐진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마음도 함께 변해왔고, 그 변화는 늘 지나온 기억들과 맞물려 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어떤 날은 따뜻한 추억으로, 또 어떤 날은 말없이 남아 있던 회한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계절은 늘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는 듯 보이지만, 예전의 겨울과 지금의 겨울은 분명 어딘가 다르고, 우리가 기억하던 계절의 감각도 서서히 흐려지고 있다. 눈이 오지 않아야 할 때 눈이 내리고, 겨울보다 겨울 같은 비가 계절을 대신한다. 계절이 변한 것인지, 계절을 바라보는 우리가 변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계절을 받아들이는 우리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눈을 보며 걱정하게 되고, 비를 맞으며 생각에 잠기는 것처럼. 그렇게 오늘도 나는 창밖의 비를 바라보며, 쉽게 이름 붙일 수 없는 마음을 조용히 들여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