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시간

-시간을 밟고 22화

by 금희

“누나, 진짜 집 팔 거야?”

두 사람은 마당 앞에 나란히 서서, 묵은 세월을 마주하고 있었다.
앞마당엔 잡풀이 무성했고, 철문엔 검게 녹이 앉아 있었다.
발코니는 오래된 마른 나뭇잎에 덮여 있었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삭아가고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키 큰 나무들에 가려 집은 그 존재조차 드러나지 않았다.

수리도, 매매도.
어느 하나 쉬울 것 같지 않아, 수잔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태오의 닦달은 당연한 듯 보였다. 그가 자신을 이해할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동생 태오가 캐나다로 오겠다고 했을 때, 수잔은 말리지 않았다.
자신과 달리 좋은 대학을 나왔고, 이름난 직장은 아니어도 부모의 기대에 잘 부응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의 결정은 어딘가 낯설었지만,
동생에게도 자신처럼 선택할 자유는 있으니까.

태오는 한 번쯤은 고급 와인을 마시고, 아주 화려하진 않더라도 좋은 레스토랑에서 돈 걱정 없이 친구들과 어울리는 삶을 꿈꿨다. 하지만 , 서울 외곽의 전세 아파트조차, 그에겐 벅찬 꿈이었다.

현실은 그를 쉽게 내보내주지 않았다.
자신의 수입으로는 원하는 삶에 발 디딜 수 없었고,
조금이라도 허영을 부리고 나면 통장의 잔고는 처참히 무너져 있었다.
그 위에 얹힌 부모님의 조용한 기대는,
묵직한 부담이 되어 자꾸만 숨을 막았다.

답답해서 몇 번이나 넥타이를 풀어헤쳤다.
그때 문득 떠오른 건,
누나가 있는 이곳.
사람들이 ‘기회의 땅’이라 부르던, 캐나다였다.


태오의 처음은 수잔과 달랐다. 귀한 아들의 고생이 싫은 부모님은 어떻게 던 돈을 마련해서 그의 경제적 자립을 도우려 했고, 누나 수잔의 전적인 도움으로 그는 영어를 배우는 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한인들과 교류하며 타고난 활달함으로 빠르게 현지에 적응했다. 부동산 중개인이 되고 교회에서 만난 같은 한국인 여자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그는 누가 보아도 정해진,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 그가 바라본 수잔의 삶은...

마치 세상으로부터 숨은 듯했다.
‘누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곳에 집을 샀을까.’
태오의 얼굴엔 말로 다 하지 못할 안타까움이 스쳐 갔다.
하지만 수잔의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한적하고 좋잖아.”
그 말은 태오의 귀엔, 마치 철없는 아이의 고집처럼 들렸다.


그럼에도 그는 묻지 않았다. 이국의 땅에서 홀로 살아온 누이의 아팠을 시간을, 굳이 들추고 싶지 않았다.

태오는 사람들 속에서 살기 위해 이 땅을 선택했고,
수잔은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이곳에 머물렀다.
같은 땅 위에 서 있지만, 두 사람의 이유는 전혀 달랐다.

그때였다.
가지 위에 앉아 있던 새 한 마리가 푸드덕 날갯짓을 하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낯선 불청객들의 방문이 못마땅한 듯, 한참을 머리 위를 맴돌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인근 마을로 향했다.
차로 두 시간.
식료품과 생필품을 사러 가는 길이었다.

차창을 살짝 내리자, 맑은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은 여전히 익숙했고, 변하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길도, 집들도 바뀌어 있었다.

‘눈 감고도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새로 지은 듯한 뾰족 지붕의 큰 집들이 도로 양옆에 늘어서 있었고,
도로는 더 넓고 반듯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여기 많이 변했네.
저 자린 정육점이었던 것 같은데.”
“어디? 아, 응. 거기 주인 죽고 식당 들어섰어.”
“샘이 죽었어? 그럼... 그 와이프는?”
수잔이 놀란 듯 되묻자, 태오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필리핀 갔지. 딸 데리고...”

수잔의 맥없는 표정을 바라보며, 태오는 무심히 위로하듯 덧붙였다.


“남 일이지 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수잔이 문득 입을 열었다.


“마리아 소식은 알아?”
“마리아? 그 여자도 이제 여기 안 살아. 필리핀 갔어.”
“마리아도? 왜?”

수잔의 목소리에 놀람이 섞였다.

“누나 한국 간 다음에, 마리아가 애들 보러 필리핀 갔다가 못 돌아왔어.
남편 쪽이랑 애들 문제로 무슨 일이 있었나 봐.
폴이 변호사도 알아보고, 필리핀까지 다녀왔는데... 결국 못 데리고 왔어.
몇 년을 그렇게 버티다, 그냥 포기하고 이사 갔지.”
수잔의 마음이 굳어버리는 듯했다.

열심히 달리고 있다고 믿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았던 세월은, 생각보다 더 매서웠다.
휩쓸고 지나간 허리케인처럼.
흘러간 시간 속에서,
세상은 어느새 그녀가 붙잡을 수 없을 만큼 달라져 있었다.

수잔은 한땐 자신이 사랑했던 삶과 단절된 채 오직 자신만의 시간 속에서 살아왔다. 지나간 시간을 잊는 건 쉬웠다. 외면하고, 기억하지 않은 채... 시간을 늘리고 줄이며,
자기만의 속도로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다.

바람이 다시 얼굴을 스쳤다.
맑고 시원했지만, 더는 위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익숙하다고 믿었던 향기조차 낯설었다.
이 씁쓸함은 남이 만든 것이 아니었다.
오롯이, 자신의 몫이었다.

왜, 지난 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을까.
한때 소중했던 사람들, 찬란했던 순간들.
그 뒤에 숨어 있던 아픔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
나는 손쉬운 핑계를 찾아 끝없이 도망치고 있었던가.
그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변하지 않고 기다려줄 거라 믿었던 것들을 조심스레 들춰보자, 먼지 속에 감춰졌던 오래된 상처들이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냈다.

상처 위에 새살이 돋아도,
그 순간의 기억은 오래도록 아팠다.
잊힌 세월, 무심히 지나친 순간들이 뾰족이 머리를 들이밀며 수잔의 마음을 찔렀다.

수잔은 흔들의자의 부드러운 움직임에 몸을 맡긴 채,
네이플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따스한 햇살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모든 것을 흘려보내듯,
시간을 밟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