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속 160km

-시간을 밟고 13화

by 금희

-혼자 떠나는 여행은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아도 괜찮다는, 조용한 선언이며, 스스로를 가장 가까이 들여다보는 시간이다.

"이 차가, 1700달러(백칠십만 원)라고요?"
수잔의 눈이 커졌다.
마치 호박이 황금 마차로 변하는 순간을 본 듯.

한국에서 그녀는 티코를 몰았다.
작고 낡았지만, 언제나 그녀의 발이 되어준 차.
고속도로에선 옆구리를 스치는 트럭들 사이에서
자신이 종이처럼 구겨질지도 모른다는, 조금은
이상한 두려움에 움찔했었다.
캐나다에 오면서, 티코는 폐차장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
700달러(70만 원) 짜리 차, 1000달러(100만 원)의 수리비.
햇빛을 반사하는 은빛 중형 세단이 그녀 앞에 놓여 있었다.

"어디로 갈 거야?"
그 질문에 수잔은 나이아가라 폭포를 떠올렸다.
이틀하고 반나절 거리, 수잔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리아와 폴의 걱정 섞인 배웅을 뒤로하고,
마치 신세계를 향해 떠나는 탐험가처럼, 수잔은
천천히 악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도시의 겨울은 늘 바빴다.
눈이 내리기 무섭게 제설차가 밀고 지나갔고,
먼지와 흙에 덮인 눈은 금세 잿빛으로 변했다.
낭만은 경적 소리에 짓눌렸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달랐다.
나무 위로 쌓인 눈은 마치 눈의 여왕의 마법에 걸린 듯 얼어붙어 있었다. 하얀 숲 전체가 은빛으로 빛나며
그 너머엔 어떤 생명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수잔과 하얀 눈만이 숨 쉬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적막의 숲은 점점 더 닫혀갔고,
빛은 낮게 깔리며 어둠의 예고처럼 따라왔다.

한참을 달린 것 같은데도,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눈 덮인 침엽수림, 얼어붙은 길, 표지판 하나 없이, 누군가 밟은 흔적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타이어 자국만 남은 길.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왔다
차 안에서 밤을 새울 수는 없었다.
이대로 멈추면,
다시는 움직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의 발에는 힘이 들어갔다.

160킬로미터.


그녀는 악셀러레이터를 깊게 밟았다. 또다시 나타난

눈앞의 갈림길, 까만 어둠 속에 가려진 표지판. 예상보다 성급한 겨울은, 어둠이 내려앉기도 전에 물처럼 번지고, 차량 하나, 작은 불빛 하나 없는 낯선 길 위에서 수잔은 방향을 잃었다.
그 많던 하얀 나무들은 어둑한 실루엣으로 변했고,
도로는 앞과 뒤가 구분되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속도를 조금 늦추며 표지판을 확인하려 눈을 크게 뜨는 순간,타이어가 찌이익! 마찰음을 내며 비명을 질렀다.브레이크는 얼어붙은 도로 위에서 휘청이며 헛돌고,조수석 바로 옆을 스치듯 지나친 스탑 사인...
하지만,다음 순간,
차는 도로를 벗어나 공기 중으로 붕,
하늘을 날았다.

쿵!

무자비한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
은빛 세단은 가파른 언덕 아래로 내리 꽂혔다.


상황을 판단하기에는 ,

공포가 아직 멈추지 않았다. 무엇이 어떻게 된 건지 생각할 틈도 없이, 얼어붙은 몸과 정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헤드라이트 사이로 앞범퍼가 덜렁이고,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차가 불길에 휩싸일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태어나서 처음 겪는, 진짜 위험이었다.

본능이 먼저 움직였다.

수잔은 온 힘을 다해 차문을 밀쳐냈다.

문틈에 박혀 있던 눈더미가 투두두둑! 쏟아지며 무릎 위로 덮쳐왔다.


간신히 열린 문틈 사이로,

수잔은 기듯이,언덕 위를 향해 몸을 끌어올렸다.


손과 무릎이 파묻힐 때마다 눈은 푹푹 꺼지며

그녀의 팔과 다리를 질끈 잡아당겼다.

숨이 쉬어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두려움은 어느새 자신을 믿을 수 밖에 없는 절박한 생존 본능으로 바뀌고 있었다.

가파른 눈 덮인 언덕 아래,
두 전신주 사이에 찌그러진 은빛 세단이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밀려오는 두려움에 수잔의 몸이 격하게 떨렸다.


한때 반짝이던 자유를 향한 기대는,
차디찬 금속의 주름 아래 조용히 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