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밟고 11화
혼자는 용기가 없었다.
리아와 함께 수잔은 그를 찾아갔다.
큰길에서 조금 들어간 골목, 자동차 정비소.
입구엔 오래된 차량 몇 대가 반쯤 분해된 채 있었고,
유리문 안쪽으론 컴퓨터와 부품, 어수선한 책상 너머로 그가 있었다.
문을 여는 소리에 고개를 들던 지훈은, 잠시 멈췄다.
수잔이었다.
작은 놀람과, 그보다 더 큰 반가움이 겹치며 그가 뛰어나왔다.
“어, 안녕하세요?”
그가 웃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중고차 좀, 부탁하려고요.”
수잔은 짧고 침착하게 대답하려 했지만 , 야속하게도 말끝이 부끄러움과 망설임으로 흐릿하게 꼬리를 내렸다.
지훈은 쭈삣 거리는 그녀가 왠지 귀여웠다. 이유야 어찌 됐던 자신을 떠올려 준 그녀가 반가웠다. 그는
익숙한 손짓으로 책상 뒤에서 서류 몇 장을 꺼냈다.
“중고차 알아봐 달라고요?”
“네. 좀... 필요해서요.”
그는 이내 ,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잘 왔어요. 나한테 맡겨요.”
잠시 두 사람을 지켜보던 리아는 수잔의 만류에도 야릇한 표정으로 윙크를 지어 보이며 살며시 자리를 떠났다.
“혹시 커피는? 들어와요.”
지훈이 그녀를 안심시키듯 소파를 가리켰다. 땀냄새가 베인 공간.
작업장 한편엔, 오래된 전기포트가 수잔의 심장처럼 폭폭 소리를 내며 물을 데우고 있었다.
기계 소음이 멀어지는 정오 무렵, 직원들이 점심을 위해 자리를 비우자, 작은 정비소 안에선 둘만의 조용한 공기가 흘렀다.
그는 가방에서 믹스커피 하나를 꺼내어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 수잔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지훈은 더 크게 하얗게 웃었다.
믹스커피 특유의 단내가 좁은 공간에 퍼졌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고국의 봄내음같이 따뜻하다는 생각을 하며 수잔은 커피 향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어디 , 가시게요?”
지훈은 말을 고르듯,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네. 그냥... 잠깐.”
수잔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창유리에 부딪힌 햇빛이 먼지로 묻어나 있었다.
말하자면, 도망치듯 떠나고 싶었다. 막연한 내일 , 힘든 일상으로부터 , 잠깐이라도 멀어지지 않으면,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굳이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컵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말을 곱씹는 듯,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언제쯤?”
“... 차만 있으면 곧.”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책상 모서리에 기대며 말했다.
“그럼... 나랑 같이 갈래요?”
수잔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장난스럽지도, 지나치게 진지하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해 보였다. 마치 감정을 걷어 낸 듯. 자연스러웠다.
“혼자 운전하면 힘들잖아요. 멀리 간다며요.
아무리 그래도.. 여긴 외국이고, 혼자 여행은 좀 위험하죠. 타이어가 펑크라도 나면 어쩌게요. 비포장 도로가 많아요. 거기다 겨울이라서...”
그는 커피잔을 들고 조용히 말했다.
“저도 요즘, 좀 답답했거든요. 어디든 떠나고 싶었어요. 괜찮다면, 같이 가죠.”
수잔은 고개를 숙였다.
말을 꺼내지 못한 채, 마음속 생각들이 복잡하게 얽혔다.
왠지 스스로가 속물이 된 것 같았다.
어제까진 귀찮기만 했던 그에게, 차를 핑계로
도움을 요청하고, 지금은 그의 제안에 솔깃해지고 있었다.
‘같이 가면 운전도 덜 힘들고, 경비도 아끼겠지...’
그런 생각들이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내 마음은? 난 이 사람에 대해 아직 잘 모르잖아. 거기다 그는 남자잖아? ’
“생각 좀 해볼게요.”
수잔은 자신의 생각을 감추듯 조심스럽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의 목소리가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이미 등을 돌린 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커피잔 위로 피어오르던 김처럼, 말하지 못한 생각들이 허공에 흩어졌다.
수잔은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이 낯선 땅의 보이지 않는 위험이 무서운 걸까,
아니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타인의 관심이 더 두려운 걸까.
그가 자신에게 단순한 호의 이상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도움을 청하는 뻔뻔함이 싫었다.
그럼에도, 이 땅에서 만큼은 가끔은 자신에게조차
낯선 위로를 기대하게 된다.
그것이 외로움 때문인지, 아니면 그리움 때문인지, 수잔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희뿌연 마음에 기대기엔, 그녀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아직은 아니었다.
흔들리는 겨울 하늘,
드문드문 떠 있는 별들처럼,
수잔의 밤은 오래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