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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뤼미reme Apr 14. 2024

벗어나고 싶어 도망치다

꿈꾸는 세상을 살 수는 없는 현실이라고 해도, 고통의 느낌을 잊을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숨을 쉬듯 올라오던 시절들이었다.



9살짜리 발에는 조금 크고 빛바랜 고무 슬리퍼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계절에는 집 앞으로 지나는 개울을 따라 조금씩 조금씩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개울 폭에 한참을  못 미치는 애기 오줌만 한 물줄기가 아슬하게 이어지는 지점이 나오고, 거기엔 햇살에 뜨근하게 달궈진 크고 작은 하얀 바위들이 잔뜩이었다.


내 키보다 넓고 판판한 바위를 찾아 누워서 뼛속을 넘어 영혼까지 데워주는 돌의 온기를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도록 집중해서 받아들이며 눈을 감고 있노라면 핑크빛 세상 속에서 그냥 단순한 호기심 속으로 도망갈 수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데 보이는 이 것들은 무엇일까'하고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해가 넘어가고 다시 쌀쌀함이 스미는 것이 느껴지며 슬퍼지곤 했다.




그렇게 나를 받아 주는 곳을 찾기 어려운 도시로 이사 온 11살부터는 더 이상 고통의 느낌을 피해 달아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별수 없이 동생과 함께 쓰는 작은 방 이불속 워크맨에서 내 귀로만 흘러드는 음악이 만들어 주는 세상 속으로 도망쳤다. 

그런 나의 모습은 엄마에게 분노를 일으켰지만 나는 언제나 도망가서 나를 보호할 궁리만 하고 있었다. 


너무 거대한 엄마는 나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이상하고 나쁜 사람이었다. 

나보다 거대한데 왜 매일 피해자처럼 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엄마는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나한테 모든 게 마음에 안 든다고 소리를 쳐댔다. 

아빠도, 나도, 동생도, 지금도, 과거도, 미래도.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냥 음악이 만들어주는 세상에 숨는 수밖에.




엄마가 방문만 열면 언제든지 쉽게 파괴될 수 있게 노출된 워크맨 속 세상은 만족스러웠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정말로 물리적으로 도망쳐야만 한다고 느꼈고, 벌써 고등학생이 된 아이가 멀쩡한 정신으로 보육원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아마도 경찰에게 붙잡혀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고, 나는 더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나를 포기할 수 없었고, 순진한 마음에 고등학교를 졸업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그건 학교에 다니는 수밖에 없는 줄 알았다. 그래서 가출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신문배달을 하고 등교하는 계획을 생각해 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물어보려고 신문배달 아저씨를 기다리던 어느 새벽, 오토바이를 타고 신문배달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냥 포기해 버렸다. 


가출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순진하고 뭘 모르면 깡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난 그런 것도 없었다. 그냥 집을 나가면 살아갈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만을 바라보며 다시 귀에 워크맨을 꼽았다. 




그렇게 긴 시간을 숨바꼭질하듯이 도망치다가 세상에서 어른이라는 동의를 해주는 스무 살, 대학으로 도망쳤다. 새벽달이 질 때쯤까지 아르바이트하느라 수업시간에 조는 날들이 서글펐지만 나는 이제 떨지 않고 도망가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것으로 위로받았다. 


훨씬 황량하고 비루하지만 이제 밤이 되어도 떠나지 않아도 되고, 아무도 함부로 침범해 부술 수 없는 나만의 바위가 생긴 것이다. 그럼에도 계속 괴로운 것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식을 두고 떠나는 엄마 같은 마음으로 막내 동생을 두고 도망쳐온 나의 바위에서 나는 책임감 있게 나를 구원하고 싶었다.





완전히 독립된,  멋지고 소중한 바위가 되어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서둘렀던 나의 결혼으로 결국 도망치기에 성공한 거라고 믿었다. 심하게 아프거나 피치 못할 상황에 따라 자꾸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집을 완전히 떠나 내가 되돌아갈 곳을 따로 마련하게 된 거라고 생각했던 결혼은 나의 마지막 피난처였던 것 같다. 


그곳엔 나 혼자도 아니고, 20대에 도망친 고시원방처럼 스산하고 비루한 슬픔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른 계집애가 오후 내내 머물던 양지바른 너른 바위처럼 따뜻하고 포근하며 쾌적한 곳, 무엇보다 더 단단하고 튼튼한 곳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런 곳은 나를 벗어나게 해 줄 거야...


화사하게 반짝이는 꽃무늬 드레스같이 웃음 가득한 설렘이 아니라 지난한 여정을 마치고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돌리며 지친 몸을 뉘이는 맘으로  버진로드를 걸어 들어갔다. 이런 나의 마음이 만든 고요한 신혼이 발랄하고 로맨틱하고 생기 가득한 다른 결혼들을 볼 때면 남편에게 미안해졌다. 

하지만 나는 긍정과 설렘을 밝힐 힘이 없었고, 그렇게 도망쳐대던 나는 드디어 쉴 곳을 찾았다.


그리고  마음껏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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