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한 고통을 느끼고 있는 사람에게 고통만큼이나 어려운 것은 어두운 절망의 바다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를 쓰면서 동시에 자신의 고통을 남들에게 직접 이해시켜야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디가 어떻게 불편한 지를 설명하고 가능하면 그렇게 된 경위를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전달해야만 한다. 고통 속에 매몰되지 않고 정신의 힘을 그러모아 자신의 처지를 알리기 위해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하면 어쩌면 사람들은 공감과 위로를 해주며 마음을 회복할 수 있도록 힘을 주거나 친절과 아량을 베풀며 해결이나 증상완화를 위한 현실적인 도움을 제공하려 들 수도 있다.
오롯이 고통스러움을 견디는 것 말고도 도움들을 얻기 위해 직접 나서야 하는 것이다.
'분명한' 고통이라는 표현을 굳이 하는 이유는 외려 '분명하다'는 것이 너무나 주관적이고 모호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고통의 증상과 경위를 알 수 있는 고통은 굳이 분명한 고통이라고 표현하지 않더라도 분명하다. '분명하다'라고 모두에게 말할 필요도 없이 동의되는 고통은 납득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불필요할 때도 많다.
아니 오히려 공감과 도움을 제한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직 본인에게만 분명한 고통은 그 괴로움의 존재를 인정받는 것조차 결코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에게만 분명한 고통이 주는 암흑 같은 서러움은 시쳇말로 나를 두 번 죽이는 일이었다.
나는 불행한 아이가 아니었다.
풍족하게 사는 아이도 아니었지만 불행한 아이라고 할 수 있는 객관적으로 공인된 지표가 없었다. 예를 들어 고아나 한부모가정이라던지(그때는 편부모가정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할 때였다.), 어디가 부러질 정도로 맞으면서 학대를 당했다던지, 밥을 굶거나 학교를 다니지 못한다던지, 아동노동착취에 시달린다던지...
뭐 그런 불행한 아이들을 떠올릴 때면 등장하는 지독한 가난이나 심각한 신체폭력, 학업의 부재나 소년소녀가장 같은 것은 하나도 해당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나를 주장하고 드러내는 아이도 아니었다. 어른들이 시키는 일을 눈에 띄게 어기는 편도 아니었고, 나의 의문과 저항감을 큰소리로 말하거나 고집 피우는 용기도 없었다. 학교에 잘 가고,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권위에 순응하며 교우관계가 무난한, 우등적이지는 않지만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무도 나에게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나 또한 누구에게도 아프고 힘들다고 말하지 못했다. 아는 어른들에게 내가 무엇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괴로운지 말한다면 모두가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
"부모님이 그러실 수도 있지~ 다 너 잘되라고 그러시는 거잖아~."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네 할 일이나 해!"
"키워주시는 은혜에 감사한 줄도 모르고 싸가지가 없네. 그런 걸로 반성하기는커녕 불만을 갖다니... 쯧쯧.."
"네가 힘드신 부모님을 잘 이해하고 덜 힘드시게 잘해야지, 더 열심히 해서 크면 부모님께 효도해라~"
나는 말끝마다 부모님께 잘하라는 말을 '잘 가'라는 인사처럼 툭 던지는 어른들을 대할 때마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에 치를 떨었다. 그래서 도저히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절대로 알겠다고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나만큼은 나를 부정하거나 배신하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의리이자 자존심이었다.
부모님이 그때 얼굴에 퍼지던 나의 부자연스럽게 굳은 표정을 보았는지는 모른다. 그런 일은 흔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분노로 얼어버렸으니 어쩌면 한 번은 봤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 같으면 학교에 상담 관련 시스템이 있어 도움을 받았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그때는 아이들의 마음 따위는 길가의 돌멩이를 보듯이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던 시대였던지라 난 그저 말하기도 애매하고 관심주기도 사소한 죄가 되는 마음을 품은 배은망덕하고 철부지인 아이일 뿐, 그 어디에서도 나의 아픔을 드러낼 수도 인정받을 수 없었다.
엄마는 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면 언제나 '그까짓 거 가지고'라고 표현했다.
아프리카 어린이들과 비교하기도 하고, 당신의 어린 시절과 비교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당시의 엄마 자신의 삶과 비교하며 '그까짓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내 아픔이 왜 알지도 못하는 아프리카 아이보다 큰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되어야 하며, 지난 세대의 어려움보다 가벼워졌다고 해서 내가 만족해야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왜 어른인 엄마의 삶을 기준으로 더 힘들지 않다면 찍소리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지, 왜 엄마의 고생이 내가 무조건 만족해야 하는 이유인지 납득할 수 없었다.
그것이 슬프고 억울해서 가슴에 파랗고 깊은 우물이 생겼다.
내가 속상해하는 내용은 모두 엄마의 비난을 사곤 했다.
대체로 겨우, 감히, 지금 나한테.. 뭐 이런 식으로 시작되는 이유였다.
나는 항상 배가 불러서 터진 소리나 하는 철이 없고 싸가지가 없는 못마땅한 딸이었다. 먹고 살아가느라 고군분투하는 엄마에게 내가 바라던 이해과 공감, 다정과 존중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였다. 그때 엄마는 내가 엄마의 비난과 조롱, 무시와 화풀이로 반복되는 언어폭력 속에서 어떻게 부서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상처를 치료하려면 상처라고 인식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상처로 인정되지 않은 상처는 꾀병이라는 비난과 함께 방치되고 더 깊이 곪아간다.
그렇게 곪아갔다.
그때 가장 큰 고통은 하루에도 몇 번씩 고통에 몸부림치도록 아프게 하는 당사자에게서 아픔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가해자가 자신의 가해성을 시인하지 않는 것이었다.
때린 사람은 없는데 맞은 사람만 쓰러져 신음하는 현장에서 나는 혼자 이상하게 괜히 아픈 사람이었다. 그건 가끔 미친것처럼 보였다. 혼자 아파하고 혼자 울부짖는 그런 미친 사람.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문동은은 엄마에게 울부짖으며 그렇게 말했다.
"내가 당신을 용서 안 하는 이유는 당신이 내 첫 번째 가해자라는 걸 당신은 지금도 모르기 때문이야"
나는 그 대사를 듣고 전율했다.
작가에게 감탄하면서. '어떻게 알았지?'(이럴 때 나는 작가의 꿈을 접어버리게 되곤 하는 것 같다. )
그래도 문동은의 엄마는 알코올중독문제에 아이를 버리는 등 두드러지고 '분명한'문제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문동은의 상처는 물론이고 복수에도 공감할 수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처럼 . 부모님이 학교도 잘 보내주시고, 옷도 사주시고, 필요한 것들도 해주시는 아이들은 부모님이 조금 때려도, 매일 싸우고 화를 내며 아이들을 공포와 불안 속에서 떨게 해도, 아이들을 '위해' 아이들을 멋대로 조종하고 통제해도, 언어폭력과 같은 행동으로 아이의 영혼을 매일같이 부숴버려도 아무도 그들을 돕지 않는다.
아파하며 휘청거리는 그 아이들은 사람들이 보기에 그저 좀 못마땅한 아이가 되거나 예민하고 인성이 더러운 아이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나는 비난받는 보통의 아이들과 동정받는 보통의 부모들을 볼 때 가슴이 돌처럼 굳어지고 눈이 뜨거워진다. 아니 피가 거꾸로 솟는다. 아이들이 너무나 가슴 아프고 부모들에게 견딜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나는 그렇게 반복되는 세상을 목격하면서 숨을 쉬듯 지난날의 나를 만난다.
아이를 탓하며 한숨짓는 부모들을 향해 마음의 칼을 들어 본다.
가여운 아이를 위해, 지난날의 가여운 아이를 위해.
삶을 보는 눈이 조금은 더 균형을 이루고 성숙해진 지금도 그때 세포에 각인된 분모와 슬픔의 기억을 재생시키는 것을 막기에는 역부족인 것이다.
이제 부모들의 어려움, 부모의 한계, 부모의 고통에 눈 맞출 수 있는 사람이 되었지만 아직도 부모의 처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생존의 공포로 시들어가는 아이들의 생명력에 가슴이 저리다.
그리고 어른이고 보호자인 당신이 뭐라도 해야 한다고 소리 없이 외치곤 한다.
지난 날의 아이를 돌봐주고 눈 앞의 아이를 지켜달라고,
가여운 아이를 위해, 지난날의 가여운 아이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