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한 장 그리고 이야기 하나
저는 텅 빈 교실을 보면 뭔가 애잔하고 코 끝이 찡해집니다. 왜 그럴까요? 그 시절이 저에게 슬픔과 환희, 두 가지의 감정에 눈을 뜨게 만들어 준 것 같습니다. 우리의 학창 시절은 애증의 역사라고 할 수 있지요.
얼마 전 2021년 수능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수능, 즉 대학 입학 자격을 획득하는 행위에 학생들이 인생을 걸어야 한다는 것에 서글퍼집니다. 학창 시절이 슬픔과 환희가 동시에 존재한다면, 슬픔의 대부분은 바로 대학 입시 때문이죠. 슬픔의 이유가 몇십 년이 지나도 안 바뀐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창 시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험 속에서는 나를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시험은 나의 1%도 설명할 수 없죠. 하지만 그 시절 저는 시험이 저를 말해준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시험 성적이 좋지 못하면 한 없이 작아졌죠. 문제는 시험을 잘 본적이 별로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학창 시절 대부분 초라한 제 자신을 바라봐야 했습니다.
시험이 저를 잘 설명할 수 있다고 가정해 보죠. 전 과목 70점을 받는 학생과, 한 과목만 100점이고 나머지는 40점인 학생 둘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대학에 갈 자격을 주어야 할까요? 모든 시험은 평균이 높은 사람을 우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나에게 평균적인 사람이 돼야 한다고 강제했던 것입니다.
창의적인 사람의 반대말이 평균적인 사람입니다.
평범하고 무난한 사람을 선택하기 위한 시험을 지금도 사용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입니다. 창의적인 인재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제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이죠. 모두 다 창의적인 것이 좋다고 하지만 대한민국은 시험에 갇혀있는 것 같습니다. 대입 시험을 시작으로 취직 시험, 공무원 시험 등등 인생을 걸어야 하는 시험들이 너무 많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나 자신을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시험에 익숙한 저는 나 자신을 설명하는 것이 정말 어려웠습니다. 누군가가 정해놓은 예문이 없고, 선택할 답변의 예시가 없으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일을 해내야만 합니다.
텅 빈 교실이 애잔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 시절의 저는 제 자신을 설명하고 싶은 욕구가 넘쳐흘렀습니다. 그렇게 생기 넘칠 수가 없었죠. 교실을 꽉 채웠던 친구들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입시가 끝나고 텅 빈 교실은 그런 나 자신이 사라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친구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는 어쩌면 자기 자신들을 설명하는 아우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험은 그런 소리를 잠재우고 교실을 텅 비우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