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을 위한 아날로그 공부
제가 처음 그림을 그린 방법은 펜 드로잉이었습니다. 펜과 종이만 있으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 정말 큰 장점이죠. 그렇다고 그림의 매력이 저하되는 것도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화려한 도구로 그린 그림보다 더 큰 매력이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날로그 펜 드로잉으로 다시 돌아갈 기회를 보고 있습니다.) 얼마 후 아이패드라는 디지털 도구를 얻게 되었고 그 후 디지털 드로잉을 주로 하게 되었습니다. 디지털이란 도구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매력이더군요. 특히 실제로 엄두도 못 내던 그림도구를 구현할 수 있다는 기쁨은 디지털을 외면할 수 없는 큰 장점입니다.
그 엄두를 못 냈던 그림이 수채화였습니다. 물감, 붓, 수채화용 종이, 팔레트 등등이 필요하고, 물감을 물에 풀어야 한다는 과정이 매우 번거롭고 불편하게 느껴져서 선뜻 시작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돈도 펜 드로잉보다 많이 들고요. 그래서 디지털 그림으로 수채화 느낌을 내 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디지털 수채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디지털 그림을 구현하는데 기존의 아날로그 방식을 답습할 필요는 없습니다. 컴퓨터 그래픽의 대가들 중에는 미술에 대해 1도 모르는 컴퓨터 덕후들이 많이 있었을 겁니다. 물론 미적 감각은 있어야 됐겠지만 전통적인 미술의 기술적 숙련도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그림을 위한 기술은 다르기 때문이죠. 간단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날로그 수채화에서는 흰색 물감을 기본적으로 쓰지 않습니다. 옅은 색에서 시작해서 짙은 색으로 쌓아갑니다. 짙은 색에서 옅은 색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죠. 디지털에서는 이런 법칙이 무시됩니다. 모든 것이 다 수정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아날로그 수채화 그리는 영상을 보면서 디지털 수채화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디지털인가? 아날로그인가? 가 중요하지 않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죠. 그림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선을 쓰는 방식, 색의 선택, 멀리 있는 대상과 가까이 있는 대상을 표현하는 방법, 음영과 그림자의 구현, 투시법 등등 (추상화나, 예술 기법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일반인들이 접하는 취미 미술에서 변하지 않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공부하기 위해서 경력이 많은 화가들이 어떻게 그리는지 살펴봅니다. 그런 화가들은 아직 아날로그 그림을 그릴 확률이 높더군요. 물론 디지털 화가들도 찾을 수 있지만 확률이 높지 않은 것 같습니다. 특히 수채화 같은 경우는 아날로그 화가의 비중이 월등히 높은 것 같습니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그 확률은 역전이 되겠지만요.
문제는 아날로그 수채화의 과정에서 배운 것들을 디지털에서 재현하기가 어렵거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죠.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경험해본 결과 아직 디지털에서 수채화 느낌을 재현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수채화 기법을 재현한다는 것은 기술적인 영역입니다. 제가 사용하는 그림 앱의 특성과 각종 툴들을 더 공부한다면, 또는 앱이 업그레이드가 될수록 그 문제는 사라질 것입니다. 핵심은 그림에서 변하지 않는 그것들을 얼마나 습득할 수 있는가? 일 겁니다. 그것들을 습득할 수 있다면 아날로그든, 디지털이든, 메타버스든 어떤 세상이 되든 무서울 게 없을 것입니다.
그림에서 빛과 어둠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어둠이 없이는 빛을 표현할 수 없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과감하게 어둠을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저도 그렇고요. 많은 아날로그 수채화 동영상속의 화가들은 거침없이 어둠을 표현합니다. 디지털의 무한 수정의 장점을 살려서 저도 과감하게 어둠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아날로그 수채화에서는 먼 곳의 색부터 옅게 칠합니다. 더 정확히는 옅고 채도가 낮게 칠합니다. 이유는 먼 곳과 나 사이에 공기가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각종 먼지와 입자들로 가득 찬 공기는 사물의 채도를 낮추어줍니다.
아날로그 수채화를 그리는 화가들이 말하는 수채화의 매력은 색들의 번짐과 다양한 색들을 섞는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 모델이 된 장면을 보면 전혀 다른 색감과 색상을 가지고 있죠. 결국 그리는 사람이 대상의 색을 다시 조합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색을 쓰는 게 쉬운 것 같아도 너무 어렵습니다. 어떤 색이 예쁘게 나올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