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림한장이야기 Aug 06. 2024

목소리의 시대, 정. 영. 음

FM 영화음악

고 정은임 아나운서의 20주년 특집방송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냥 반갑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옛날 사람으로서 점점 무뎌지는 현실 감각을 극복하기 위해 기를 쓰며 현재를 받아들이고 있는데, "정은임"이란 이름은 한순간에 옛날 그 시절로 저를 보내버리기 때문입니다.  

FM 영화음악

목소리의 시대, 정. 영. 음


혹시 고 정은임이란 아나운서를 아시나요? 혹시 MBC 라디오의 "FM 영화음악"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아니, 라디오를 들으시나요? 라디오가 TV 못지않은 인기를 끌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TV도 안 보는 시대가 되었네요. 


영화를 많이 좋아하는 사람들, 지금은 덕후라는 단어를 쓰나요? 영화덕후.. 아니면 다른 신조어가 나왔나요? 그 시절 영화를 특별히 사랑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을 "씨네필"이라고 부르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영화음악과 영화 이야기들을 듣고 자랐죠. 그렇게 성장한 아이들 중 한 명이 바로 저입니다. 


비주류였던 영화음악은 거의 언제나 심야방송이었습니다. 인기 있는 연예인을 DJ로 쓸 수 없어 거의 방송국의 아나운서들이 DJ를 맡았습니다. 그들 중에 "정은임" 아나운서가 있었던 것이죠. 불운의 교통사고로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20년이 흘렀습니다. "정. 영. 음 (정은임의 FM 영화음악)"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영화음악 DJ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아직도 정은임이란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영화에 대한 사랑과 열정만으로 전설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녀에게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민감한 정치적 발언도 서슴없이 말하던 그녀의 당참은 부드러움 속의 카리스마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었습니다.


고 정은임 아나운서의 20주년 특집방송에서 "변영주" 영화감독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영화를 소중히 대하던 시대는 끝났다. 그런 시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가슴에 비수가 꽂히듯이 저려왔습니다. 


그 시절 라디오를 듣던 때는 대중문화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소중히 음악을 녹음해서 들었고, 돈을 모아서 설레며 극장을 찾아갔습니다. 비디오테이프가 늘어지도록 영화를 보았죠. 만질 수는 없지만 그것들을 애지중지했습니다. 지금의 대중문화는 쓰기도 전에 버려지는 것 같습니다. 뭘 들을까? 뭘 볼까? 고르다가 귀찮다며 버려집니다. 


MBC 라디오의 "FM 영화음악"은 아직도 심야에 전파를 타고 있습니다. 심야에 할 것이 없었던 어린 저와는 달리 지금의 저는 심야에 할 것으로 넘쳐납니다. 가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영화음악과 DJ의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묘한 감동과 슬픔이 느껴집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밥 로스 vs 미야자키 하야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