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뒷장 드로잉

손글씨와 펜 드로잉

by 그림한장이야기

어린아이였던 시절 한 달의 시간이 지나고 달력을 뜯어내던 날, 그 달력의 뒷장은 저의 것이었습니다. 어린아이가 볼 수 있는 가장 큰 백지였죠. 로보트 태권브이나 마징가 Z를 달력의 뒷장에 원 없이 그렸던 기억이 납니다. 세월이 많이 지난 지금도 달력 뒷장은 우리 집에서 가장 큰 백지더군요. 그 큰 백지에 드로잉을 했습니다.


손글씨와 펜 드로잉

달력 뒷장 드로잉

어린 시절의 나는 그 광활한 여백을 가질 수 있는 매월 1일을 기다렸습니다. 달력 뒷장을 마루에 펼치고 엎드려서 연필을 손에 쥔 순간이 너무 신났습니다. 지금, 그 광활한 여백을 눈앞에 접하자 그 막막한 감정이 두려움으로 다가왔습니다. "뭘 그리지?" "이렇게 큰 여백을 어떻게 채우지?"


건축가들이 높은 천장에서 창의력이 나온다고 말합니다. 작은 종이보다 넓은 종이가 그림에게는 좋은 환경이죠. 천장 높은 공간과 넓은 종이는 비쌉니다. 펜 드로잉에는 두 가지가 필요한데 펜과 종이입니다. 그중에서 종이의 비용이 절대적입니다. 다이어리 크기 정도의 드로잉북을 다이소에서 가장 저렴하게 구입해서 사용하고 있죠. 비용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작은 크기의 종이를 선호하게 됩니다.


나는 왜 달력 뒷장을 잊고 있었던 것일까?


달력 뒷장을 활용할 필요가 없어진 풍요로움이 오히려 저의 마음을 궁핍하게 만들었습니다. 멋진 재료의 폼보다는 그리는 즐거움이 먼저라는 것을 망각했습니다.


엄청난 여백의 공간이 두려움에서 신기함으로 바뀌는 순간, 누리지 못했던 자유로움을 맛보게 됩니다. 언젠가 달력 뒷면을 가득 채울만한 풍경을 그리고 싶습니다. 그림의 고수들이 한결같이 입모아 말합니다. "크게 그리다가 작게 그릴 수는 있어도, 작게 그리다가 크게 그리기는 어렵다." 넓은 세상을 접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탁상 달력 말고, 벽걸이 달력을 가지고 있나요? 그러면 달력 뒷장에 그림을 그려보세요. 저에게는 1년 치 달력 뒷장이 남아있습니다. 얼마 전에 2026년 달력으로 교체했기 때문입니다. 넓은 여백의 공간으로 무한한 세상을 상상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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