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 한강
그저 겨울이 지나간 게 봄이 오드만, 봄이 오면 늘 그랬듯이 나는 다시 미치고, 여름이면 지쳐서 시름시름 앓다가 가을에 겨우 숨을 쉬었다이. 그러다 겨울에는 삭신이 얼었다이. 아무리 무더운 여름이 다시 와도 땀이 안 나도록, 뼛속까지 심장까지 차가워졌다이. : P 190
1980년 5월의 광주'를 처음 접한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생 시절, 그나마 흥미가 있었던 근현대사 과목에서 관련된 내용을 배우기도 했었고, 영화를 통해서도 몇 번 접했었다. 그렇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아주 단편적으로만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을 뿐, 이토록 생생하게, 그렇기에 잔인한 진실을 접한 것은 처음이었다. 책장을 펼치던 그 순간도 그랬지만 책장을 덮고 나니 마음이 더 무거웠다. 그저 책으로 이야기를 접했을 뿐인데도 이렇게 마음이 먹먹한데 '80년 5월 광주'를 살았던 그분들, 그리고 그분들의 가족들, 친구들, 연인들 모두가 그 상처를 안고 어떻게들 살아냈을까 싶어 가슴이 답답했다. 그것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조차 없는 고통일 것이다.
1980년이면 불과 36년 전이라는 얘기다. 내가 태어나기 전이긴 하지만, 나의 부모님이 청년 시절을 보내고 있었던 그때인 것이다. 어쩌면 내 가족 중 누군가가 바로 그 날의 희생자가 되었을 수도 있는 이야기. 그렇기 때문에 남의 일이 될 수 없는 이야기이고 결코 남의 일이 되어서는 안 되는 명백한 우리의 이야기. 그것이 바로 5.18 민주화 운동이다.
동호, 은숙, 선주, 진수와 마지막까지 시민 군으로 남았던 청년, 동호의 어머니, 그리고 이들의 기억을 찾아 나서는 '나'까지. 이 책은 다양한 시점으로 자신과 타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쓰여 있다. 작가는 그저 문장을 읽어 나가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전해져 오는 것 같은 잔인한 기억들을 너무나도 담담하게, 그렇지만 무겁게 들려주고 있다.
나는 이 참혹한 진실을 마주하면서도 사람이 사람에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자비하게 총과 칼을 겨누었던 '군인'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불과 36년 전에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책을 읽는 내내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하면서도 도무지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때, 무고한 사람들에게 총과 칼을 겨누면서도 아무런 죄책감과 미안함도,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자의식도 없이 군인이라는 명분 하에 살인을 저질렀던 그 수많은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 무엇보다도 5.18 민주화운동의 타도 대상이었던 바로 그 전 대통령은 아직까지도 멀쩡히 살아 있다는 사실 앞에서 새삼스레 분노가 느껴진다.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 실제로 그들에게 있었고, 그 일은 바래지고 잊힌 채 정작 고통받아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도 떳떳하게 살고 있는 세상. 국민을 지켜주지는 못할망정 아무렇지 않게 폭력을 휘두르고 잔인하게 죽이기까지 하는 것이 정녕 국가인 걸까?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 P 114
솔직히 말해 나는 역사를 잘 알지 못하고 정치에도 관심이 없다. 과거를 바라보는 수많은 다른 생각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냥 이 책을 읽은 뒤 너무나도 슬펐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나라와 군인은 어떻게 그렇게 무자비할 수 있으며, 시민들은 어떻게 그렇게 용감하게 맞설 수 있었을까? 이 책에 나오는 것처럼 그저 '양심'에 따랐던 것일까, 그것이 진정 자신의 젊음과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과, 삶과 목숨까지도 내놓을 만큼 간절했던 것일까? 그저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그저 책 한 권을 읽은 것이 아니라, 아주 생생하게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 든다. 실제로는 더 극악무도하고 참혹했을 그 시절로.
한강 작가가 이 모든 괴로운 사실들을 마주하면서 책을 써 내려간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이미 지나버린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는 울음으로 이 책을 써 내려가지 않았을까.
이렇게 파렴치하고 무자비한 과거를 갖고 있는 이 나라를 어떻게 냉소하지 않을 수 있을지, 어떻게 희망을 갖고 바라볼 수 있을지 더 자신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기억하고 붙들고 있어야만 한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냐는 물음에는 나로서는 할 말이 없지만,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존엄한 용기와 무고한 희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지 않을까. 그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는 뼈아픈 사실 앞에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눈이 더 나빠져 가까운 것도 흐릿하게 보이면 좋겠다고 너는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흐릿하게 보이지 않는다. 무명천을 걷기 전에 너는 눈을 감지 않는다. 피가 비칠 때까지 입술 안쪽을 악물며 천을 걷는다. 걷은 다음에도, 천천히 다시 덮으면서도 눈을 감지 않는다. 달아났을 거다,라고 이를 악물며 너는 생각한다. 그때 쓰러진 게 정대가 아니라 이 여자였다 해도 너는 달아났을 거다. 형들이었다 해도, 아버지였다 해도, 엄마였다 해도 달아났을 거다. 체머리 떠는 노인의 얼굴을 너는 돌아본다. 손녀 따님인가요, 묻지 않고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기다린다. 용서하지 않을 거다. 이승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적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너는 마주 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 P 45
각진 각목이 어깻죽지와 등허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자신의 곧은 물성대로 활짝 펴지며 내 몸을 비틀 때, 제발, 그만, 잘못했습니다. 헐떡이는 일초와 일초 사이, 손톱과 발톱 속으로 그들이 송곳을 꽂아 넣을 때, 숨, 들이쉬고, 뱉고, 제발, 그만, 잘못했습니다, 신음, 일초와 일초 사이, 다시 비명, 몸이 사라져 주기를, 지금 제발, 지금 내 몸이 지워지기를. : P 121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에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타인과, 특히 남자와 접촉하는 일을 견딜 수 없게 됐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짧은 입맞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 여름에 팔과 종아리를 내놓아 누군가의 시선이 머무는 일조차 고통스러웠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몸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모든 따뜻함과 지극한 사랑을 스스로 부서뜨리며 도망쳤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더 추운 곳, 더 안전한 곳으로.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 P 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