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 김정운
작가는 정확히 만 50세가 되면서 '난 이제부터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한다!'고 결심하고, 정말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살아보고자 일본으로 건너가 그림 공부를 시작한다. 12년 동안의 교수 생활을 정리하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가족을 뒤로한채 자신의 오랜 꿈이었던 그림을 그리기 위해 떠난 것이다. 이로써 그의 최종학력은 문화심리학 '박사'에서 일본화를 전공한 '전문대 졸업자'가 되었고, 그것이 스스로 가장 자랑스러운 학위라고 이야기한다. 일본으로 건너가 4년간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의 책도 쓰고, 번역도 하고, 일본어도 배우며 부지런하되 급하지 않은, 여유롭지만 게으르지 않은 시간들을 쌓아 나간다. 그는 일본에서 지낸 4년 동안 참 많이 외로웠지만,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생산적인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평생 공부를 업으로 삼아 살아왔지만 그토록 재미있게 공부한 적이 없으며 그것은 모두 '외로움을 담보로 얻어낸 성과물'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서점에서 스윽 읽었을 때는 작가의 유머코드가 내 취향인 것 같아 망설임없이 구입했는데, '문화심리학'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쉬운 내용은 아니어서 조금 당황했다. 문화심리학과 관련된 전문용어와 지식 등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안됨에도 불구하고 내가 끈질기게 이 책을 다 읽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중간중간 작가의 그림이 삽입되어 있어서 그림을 하나씩 훔쳐보는 것도 재미있었고, '오리가슴' 이라는 작가로서의 그의 '호'가 참 신선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지루해질만 하면 한번씩 튀어나오는 음란마귀같은 김정운식 유머에 중독 되었다고 하면 나 좀 이상한가.
어쨌든 책 내용에 대한 이해와는 상관없이 흥미롭게 읽은 거의 유일한 책이 아닐까 싶다. 평생을 공들여 이룬 자신의 지위와 역할, 책임을 내려놓고 새로운 배움을 위해 떠난 작가의 용기와 열정이 대단한 것임은 틀림없다. 나도 '젊고 늙음' 이라는 기준으로 나를 규정하지 않으면서 인생을 살아내고 싶다. 그렇게 살도록 내 길을 만들어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의 한 잡지에서 조사해보니 여자들은 하루에 적어도 아홉 번 이상 자신의 화장에 대해 생각한다고 한다. 여성 30퍼센터는 잠자기 직전까지 화장에 대해 생각한다고도 했다. 세 명 중 한 명은 화장하지 않고는 집 밖에 절대 나가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열 명 중 세 명은 아이를 학교에 데려줄 때 립스틱이라도 꼭 바른다고 했다. 무슨 뜻인가? 여자의 화장은 남자와는 별 상관없다는 거다. 오히려 다른 여자들 때문에 화장한다는 대답이 많았다. 남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아니라 다른 여자들보다 더 멋지게 보이려고 화장한다는 것이다. 한국보다 화장에 훨씬 둔감한 영국 여인네들 이야기다. : P 35
주어진 상황에 따라 인간에게는 '여러 자아'가 제각기 다르게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이때 무대 위의 여러 자아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상대화할 수 있는 무대 뒤의 공간이 필수적이다. 즉, 분장을 하고 분장을 지우는 '배후 공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무대 위나 무대 뒤의 어느 한쪽만 진짜 삶이라고 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해서는 안 된다. 무대 위가 다양한 역할이 실재하는 삶이듯 무대 뒤의 삶도 진짜라는 거다. : P 36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불안'으로 정의한다. 도무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현재의 시간 속에 그저 '던져졌다'는 의미로 '피투성'이라는 표현을 쓴다. 시간으로 인한 불안을 극복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피투성이'의 삶을 산다는 뜻이다. ; P 44
떨어지는 낙엽에 늙어가는 것을 슬퍼할 일이 아니다. 이 가을에는 아름답고 기분 좋은 것들만 기억해야 한다. 또 먼 훗날 즐겁고 가슴 찡하게 기억할 만한 것들을 죽어라 만들어놓아야 한다. 앞으로도 오래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라고 낙엽도 지고 단풍도 드는거다. : P 79
'그리움'은 그림畫, 글書과 어원이 같다. 모두 '긁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긁는다는 것이 뾰족한 도구로 대상에 그 흔적을 새기는 행위라고 할 때, 활자의 형태로 긁는 것은 '글'로, 선이나 색을 화폭 위에 긁는 것은 '그림'이라는 말로 변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생각이나 이미지를 마음속에 긁는 것은 '그림'이라는 말로 변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생각이나 이미지를 마음속에 긁는 것은 '그리움'이 된다. 참으로 기막히게 아름다운 단어다. 막연한 그리움이 현실 속에서 실현 가능한 것으로 변할 때 생기는 심리적 반응은 '설렘'이다. 행복의 기준은 바로 이 설렘의 유무다. 그저 느긋하고 여유로운 상태는 행복이 아니다. 금방 지루해진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설렘이 동반된다면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 된다. 사랑에는 그리움과 설렘이 동반된다. : P 97
행복감이란 생존과 종족 보존을 위한 수단을 따름이며, 행복은 아주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한다는 주장이다. 행복의 조건은 더욱 분명해진다.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것 자주 먹고, 하얀 시트 커버의 침대에서 잘하는 거 혹은 잘 자는 거다. 행복은 아주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이다. : P 114
인간이 위대한 까닭은 미숙아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측면에서든 미숙한 이들을 사랑하고 배려해야 한다. 미숙함이야말로 소통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측은지심과 의사소통은 동전의 양면이다. : P 253
월급쟁이 생활을 때려치우기만 하면 바로 내 삶의 주인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큰 착각이다. 평생 추구해야 할 공부의 목표가 없음을 돈의 문제로 환원시키며 자신의 쫓기는 삶을 정당화하는 것 또한 참으로 비겁하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지 않을 관심의 대상과 목표가 있어야 주체적 삶이다. 우리가 젊어서 했던 '남의 돈 따먹기 위한 공부'는 진짜 공부가 아니다. : P 318
단 한 번 밖에 없는 내 인생, 내 맘대로 사는 걸 결코 두려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더구나 오십 중반의 나이에는 말입니다. : P 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