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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Jan 27. 2022

한국과 영국에서 경험한 "안 나가면 경찰 부릅니다"_2

"그 이름으로 된 서류가 없는데요."


전화와 이메일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내가 사무소를 직접 찾았을 때다.


분명 이번 주에 서류가 통과될 거라 했음에도 소식이 없었다. 갑갑해서 전화해보니 담당자가 지난주에 퇴사해버렸단다. 그럼 내가 보낸 서류는 어떻게 되었나 문의했더니 내 이름이 들어간 신청서가 없다고 한다.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컴퓨터와 인터넷을 활용하는 업무 체계가 영국에 완전히 자리잡지 않았던 시절이다. 상당수의 행정 처리를 종이 문서에 의존하고 있었다. 신청서도 종이로 작성하고 증빙서류도 종이로 준비해서 우편으로 보내야 했다. 간단한 등록 작업도 많게는 수십 장에 달하는 종이에 일일이 검은 펜으로 대문자까지 써가며 적어야 했다. 입력할 내용이 중복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먼저 페이지에 기입한 정보를 다음 페이지에서 또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번거롭게 작성하고 증빙서류와 관계자 서명까지 받아서 보낸 신청서가 없어졌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내 서류를 접수했다던 담당자마저 그만두고 없다. 사무소를 찾아간다고 해서 없어진 신청서가 나올 리 만무하지만 너무나 기막히고 황당하고 무엇보다 내 사정이 다급해서다.


학생인 남편과 함께 학교 기숙사에 거주하던 때다. 자녀가 없는 커플만 거주할 수 있는 곳이다. 나의 출산을 앞두고 기숙사 재계약 시기가 다가오는 바람에 우리 부부는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되었다. 가족용 기숙사는 우리에게 경제적 부담이 컸다.


마침, 영국의 임대 주택이 기숙사보다 저렴하다더라, 거기 들어가면 되겠네, 라는 조언을 듣고서 내게 희망이 생겼다. 나중에 알고 보니 완전 근거 없는 정보였다. 한인 사회 어느 곳에나 접할 수 있는 '카더라 통신'에 해당한다. 당시 외국인은 영국의 임대 주택에 입주할 자격이 없음을 모른 채 나는 기숙사 재계약은 포기하고 임대 주택으로 들어갈 날만 고대하고 있었다.


우리의 신분을 알면서도 신청서를 받아들인 건 임대 주택 사무소의 실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몰랐다. 담당 직원이 가능하다고 해서 모든 서류를 작성하고 남편 학교 관계자와 교수로부터 서명을 받은 뒤 증빙서류도 준비했다. 이 모든 신청 과정이 흔하게 진행되는 사례가 아닌 데다 남편과 나 모두 영국의 행정 절차에 익숙하지 않던 시절이다. 서류 준비에 관여한 사람들 모두에게 폐를 끼친다는 기분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사무소에 도착해서 아까 전화를 한 사람이라고 밝혔다. 분명 2주 전에 신청서를 보냈고 담당 직원이 처리 중이라는 말을 믿고 엊그제까지 기다렸는데 이제 와서 서류가 없다니 그게 말이 되냐고 따졌다.


50대로 보이는 여성이 나서더니 샅샅이 뒤졌는데도 내 이름으로 된 서류도 없고 담당자도 떠났으니 자신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한다. 목소리를 들으니 아까 전화를 받았던 이다.


"담당자가 떠나도 내가 보낸 서류는 있을 거 아닌가요?"


전화상으로 한 질문을 다시 반복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안이 없었다. 직원이 보라는 듯 캐비닛을 열더니 'L'이라고 적힌 서랍을 뒤지는 시늉을 한다. 내 눈으로 확인시켜 주려나보다. 하지만 벌써부터 문제가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의 성인 'Lee'라는 이름으로 서류를 찾는 것이겠지. 부부의 이름이 모두 들어간 서류이지만 내가 메인 신청자이기에 내 성인 Jeong으로 찾아야 한다. 남편 학교와 교수로부터 받은 증빙서류 때문에 이 사무소에는 남편 이름이 더 익숙할 수도 있다. 또한 내가 결혼한 여성이니 당연히 남편의 성을 따르겠거니 짐작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Lee가 아니고 Jeong이거든요. 세상의 모든 여자가 결혼한다고 남편 성을 따르지는 않는다고요. 아까 전화상으로도 Jeong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서류를 찾아달라고 했잖아요."


내 지적에 당황한 직원이 그제야 제대로 찾으려는 움직임을 보이며 J를 찾아 부랴부랴 서랍을 뒤진다. 그런데 J 서랍이 어디에 있는지 허둥지둥한다. 알파벳 순으로 된 캐비닛 서랍이니 L 보다 더 왼쪽이나 위로 가야 하지만 반대쪽 서랍만 열어댄다. N이 나오고 P도 나온다. 엉뚱한 서랍에서 서류 뭉치를 집어 들더니 이게 아닌가 싶어 저쪽 책상으로 던져놓는다. '이 사람아, 꺼내 본 서류는 제자리에 넣어야지!' 옆에서 호통이라도 치고 싶었다. 설상가상으로 이 여성은 방금 어느 서랍을 열었는지도 잊어버린 듯하다. 이런 식으로 하다간 멀쩡히 보관 중이던 서류가 분실되는 건 시간문제겠다 싶다. 나는 갓 서른을 넘긴 나이기도 했지만 시력이 좋은 편이라 먼발치에서 이 모든 광경이 다 보여 갑갑함만 더해갔다.


한창 서류를 찾던 직원의 분주한 어깨에 점차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바쁘게 업무를 수행하던 중 갑자기 나타나 서류 찾아달라고 호소하는 나 때문에 이 사람도 점점 지쳐가나 보다. 해결책이 안 보이니까 최후의 수단을 꺼낸다.


"안 나가고 계속 업무를 방해하면 경찰 부릅니다."


나 같은 민원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이 사람들 업무 아닌가? 부실한 서류 관리 때문에 민원인이 사무소까지 찾아오게 만들어 놓고 해결은 못할 망정 경찰 부르겠다고 윽박지르다니. 물론 나도 잘했다는 소리는 아니다. 내 신청서를 실수로 접수한 직원이 있었고 그 직원과 함께 서류가 사라지면서 생긴 문제를 다른 직원에게 호소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경찰이 온다고 해서 두려워할 일도 없다. 민원인이 사무소에 와서 항의한 걸로 경찰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나. 한국에서 경험한 경찰 출동과 별반 다를 바 없다고 여겼다.


"I am going to call the police..."

"I am calling the police..."

"Calling the POLICE..."


경찰 부른다는 소리에 내가 아무런 반응을 안 보이자, 자기 말을 못 알아들었다 생각한 건지, 아니면 겁박이 안 통한다 여긴 건지... 이 여자가 점점 더 문장은 짧게, 소리는 크게 하면서 Police라는 단어를 강조한다. 아주 익숙한 패턴이다. 한국에서 만났던 에이전시 사장과 어쩜 이렇게 동일한지. 그래서 이번에도 동일하게 답해줬다.


"Yes, please, do so..."

예, 제발 그렇게 하세요.


얼마 뒤 남녀로 구성된 경찰 두 명이 사무소에 들어섰다. 다행히 이 사무소 직원은, 한국의 에이전시 사장처럼, 사태를 부풀려 신고하지는 않았나 보다.


나의 사정을 전해 들은 경찰은 이번에도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자신들이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미안해했다. 그리고 일단 신고가 들어왔으니 신고자가 요구한 대로 내가 자발적으로 사무소를 떠나 줬으면 한다고 간곡히 부탁했다.


일은 또 어쩔 수 없이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이번에도 경찰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아무 일도 못하고 나만 바라보는 경찰이 안쓰러워서, 또 이런 일에 경찰 인력이 낭비되는 것이 신경 쓰여서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King's Church International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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