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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Feb 10. 2021

영국에서 헌혈을 해보니

한국과 다른 영국의 헌혈 규정

한 때 헌혈을 꾸준히 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는 안 하던 것을 영국에 와서, 그것도 서른이 넘어 처음 해보고 이후 계속했다. 한국이 아닌 영국에 와서 한 이유는, 누구나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계기가 엉뚱할 때가 있듯 나도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 누구는 군대에서 초코파이를 먹으려, 누구는 헌혈의 집을 지나다가, 누구는 친구를 따라갔다가, 누구는 영화표나 선물에 유혹되어...헌혈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채혈 바늘이 무섭기도 했고, 어릴 적부터 어지럼증을 많이 겪어서 헌혈에 적합하지 않은 체질이라 짐작했다. 또한 헌혈 부작용에 대한 괴담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결혼 후 영국에 와서 직장을 다니고 출산까지 하면서 내 건강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얻으니 헌혈을 못할 것도 없겠다 새로이 판단했다. 물론 그건 내 생각이고 헌혈할 수 있는 체질인지 아닌지는 가서 검사받아야 알 수 있다.


영국에 기록적인 한파가 닥친 어느 해 겨울, TV 공익 광고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폭설로 인해 헌혈의 집 방문자가 줄어 혈액이 부족하다는 내용이었다. 이 정도까지만 했더라면 여전히 망설였을지 모른다. 그런데 활용 범위가 넓은 O형 혈액이 특히 더 필요하다는 말에 내 마음이 움직였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갑자기 내 혈액형에 대한 자부심이 생겨나면서 나의 헌혈 역사는 시작되었다.


마침 헌혈의 집이 가까운 곳이라 폭설이 내려도 가는 길을 걱정 안 해도 되었고, 처음 헌혈하는 나를 위해 가족도 따라나서는 것에 동의했다. 다만, 이 남자들은 오로지 따라만 가겠다고 했다. 특히 남편은, 자기는 군대에서 실컷 피 뽑아서 더 이상 뽑을 피가 없다, 오로지 구경만 하겠다 강력히 못 박았다. 어려서부터 병원과 치과는 신나는 구경거리요 스티커 받는 곳으로 인식하던 아들은 주삿바늘과 의료 시설이 즐비할 헌혈의 집 또한 당연히 궁금해하고, 헌혈과 무관한 나이니 홀가분하게 따라간 것이리라. 


다행히 헌혈하기에 내 건강에는 문제가 없었다. 어지럼증을 많이 겪는 것은 혈압이 평균보다 낮아서인데 그렇다고 병적인 수준은 아니고 헌혈 전 기초 검사도 통과하고, 헌혈 후에도 아무런 부작용이 없었다.



- 한국과 다른 헌혈 규정 -


영국의 헌혈 규정은 한국과 다른 점이 몇 가지 있다. 


1. 헌혈 증서

한국처럼 헌혈 후 주어지는 헌혈 증서를 이용해 수혈받을 때 비용을 공제받는 혜택이 영국에는 없다. 영국의 의료 체계는 국민의료보험 기관인 NHS에 의해 움직이고 헌혈 또한 이곳에서 관리한다. 영국의 의료비는 기본적으로 무료이다. 즉, 수혈이 필요한 환자의 진료도 무료이다.  


2. 헌혈 횟수

나는 성분 헌혈 대신 전혈 헌혈만 했기에 이 내용만 비교하면, 한국에서는 연간 최대 5회까지 헌혈이 가능하고, 영국에서는 최대 3회까지다. 헌혈 후 16주가 지난 날짜를 기준으로 다음 헌혈을 예약해주기 때문에 4개월마다 헌혈할 수 있다. 


3. 헌혈자에게 주는 혜택

상품권이나 영화표, 과자, 음료수는 물론 헌혈 증서까지 주는 등 혜택이 많은 한국에 비해, 영국에는 금전적 가치를 따질만한 혜택은 없다. 이런 혜택만 바란다면 나는 한국에서 헌혈을 했어야 한다. 헌혈 후 몸에서 빠져나간 영양을 보충할 정도의 음료와 간식만 준다. 



헌혈을 하고 받은 과자와 스티커이다. 피를 뽑고 자리에 돌아오자, 아들은 내가 받은 과자부터 탐냈다.


- 위 사진에 나오는 것처럼 어린아이를 둔 헌혈자에게 주는 스티커 종류로는

여자아이 그림 + My mum gave blood today (우리 엄마가 오늘 헌혈을 했어요)

남자아이 그림 + My dad gave blood today (아빠가~)

여자아이 그림 + My grandma gave blood today (할머니가~)

남자아이 그림 + My grandad gave blood today (할아버지가~)


이렇게 4개 버전이 있는데, 내가 주인공이기에 엄마라는 글자가 들어간 걸 고르긴 했다만,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라도 '남자아이 그림 + 엄마가~' 버전도 만들면 어떻겠냐고 담당자에게 농담조로 부탁하고 왔다.


4. 헌혈의 집 운영 방식, 헌혈자 모집

London West End Blood Donor Centre


영국에는 대도시 등 일부 지역에만 상설 헌혈의 집 (Blood Donor Centre)이 있다. 나머지 지역에는 학교나 마을 회관 등을 빌려 임시 헌혈의 집으로 쓰고, 상설 기관이 아니므로, 월 몇 차례 혹은 주 1회 정도만 운영한다. 당일 일정이 끝나면, 장비를 챙겨 철수한다. 길거리에서 헌혈자를 모집하거나 홍보하는 행위는 없다. 헌혈 기준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기존 헌혈자의 꾸준한 헌혈을 권장하는 편이다.




거리 모집도 없고 무료 혜택도 안 주어지는 영국에서 누가 헌혈을 할까?...아마 나 같이 우연한 기회에 시작한 사람과 그들의 가족 혹은 친구가 아닐까 싶다. 또한 가족이나 친지 중 수혈이 필요했던 환자가 있어서 이를 계기로 시작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헌혈을 일회성 행사가 아닌 꾸준히 할 수 있는 봉사로 생각한다. 그리고 연 3회라고 하니 크게 부담되지는 않았다.


예전에 다니던 헌혈의 집은 학교 강당에 꾸린 임시 시설이라 주 1회만 운영하므로 헌혈 가능한 날짜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내가 첫 헌혈하던 날 같은 자리에 있던 헌혈자들 중 일부를, 4개월마다 반복해서 만나기도 했다. 반드시 16주마다 출석해야 할 의무가 없음에도 이를 빼먹지 않고 온 것이다. 그렇게 만난 헌혈 동기 중에는 아들이 다니던 초등학교의 교직원도 있다. 그 여성 혼자만 온 것이 아니라 남편은 물론 동생 가족도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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