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숙진 Mar 05. 2021

혼밥 도전, 영국에서는 이렇게 해요

번역가로 일하다 보니, 한국에서는 흔하게 사용하지만 영어 문화권에서 생소하게 다가오는 말이 있는가 하면, 영어 문화권에서 자주 쓰면서도 한국어로 설명하기 힘든 말을 접한다. 책 번역이라면 번역자 해설로 보충하면 되지만, 몇 초짜리 영상이나 손바닥만 한 지면에 모든 정보를 담는 광고는 제한된 시간과 공간에서 의미를 전달해야 하니 곤란하다. 최대한 원뜻과 가까운 어휘를 찾아내고 말의 길이까지 맞추느라 머리를 쥐어짠다.


혼밥이라는 말을 번역한다면 아마 이런 상황에 해당할 것이다.


혼밥은 말 그대로 Eating alone이지 않은가?라고 반응할 수 있지만, 혼자 밥 먹는 행위는 서양 문화에 흔하다. 밥이라는 말이 들어간 속담과 인사말, 유행어까지 숱하게 존재하고 밥 문화와 예절에 큰 의미를 두는 한국에서 생겨난 혼밥이라는 신조어는 Eating alone만으로 설명이 부족하다. 'Mukbang'이라고 그대로 해외에 소개되는 한국의 '먹방'처럼 혼밥도 그 자체만으로 고유한 단어로 해외에 알려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혼밥 레벨 테스트라는 표현과 구체적인 도전 영역까지 분류될 정도이니 한국에서의 혼밥은 쉽지 않다. 


나는 술을 못하기 때문에 술이 들어가는 단계를 빼고는 거의 다 해본 것 같다. 그렇다고 혼밥 예찬론자는 아니다. 가급적이면 누군가와 대화 나누며 같이 먹기를 선호한다. 그래서 친구, 동료와 어울려 밥 먹으러 가는 일에 적극 나서는 편이다. 하지만 누구나 살다 보면 혼자 먹어야 할 일이 생긴다. 나에게는 자주 일어났다.


1년간 대학을 휴학하던 중 미국계 회사에서 비서로 근무한 적이 있다. 출산 휴가를 떠나는 직원의 자리를 내가 맡은 것이다. 한국 국방부가 추진하는 다국적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미국 전투기 회사가 내가 근무하던 곳이다. 한국 회사, 내가 속한 미국 회사, 다른 협력 회사까지 모두 군부대에 위치해 있었다. 출근할 때마다 헌병으로부터 출입증 검사를 받았다. 


이곳의 구내식당은 항공기 개발과 생산에 참여하는 한국의 군 관계자와 민간 직원, 외국계 회사 직원까지 출입하는 곳이라 내가 본 식당 중 가장 컸다. 같이 근무하는 미국인들은 서양식 메뉴가 나오는 날을 빼고는 대부분 외부에 나가 식사를 하니, 주로 나 혼자 회사 식당에 갔다. 군부대에 속한 공간과 업무 성격상 어디서나 남자들뿐이다.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여직원도 있지만 극소수에 해당했다. 멀고도 먼 테이블에 앉은 여성 동지들과 합류하기 위해 운동장처럼 넓은 식당 속 인파를 헤치고 갈 수는 없었다. 근처 사무실 직원들과 친해져 어울리기 전까지 약 2주간 낯선 남자들 틈에 끼어 밥을 먹었다. 혼밥이라는 말은커녕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식사하는 일과는 거리가 먼 90년대 후반의 이야기다.


워낙 많은 이들이 한꺼번에 빠른 속도로 식사하기 때문에 혼자 한 테이블을 잡을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아무 자리에나 무턱대고 다가가 "여기 앉아도 되지요?"라고 질문인지, 통보인지 해놓고는 애써 당당한 태도로 식판을 내려놓고 앉았다. 다행히 나 같은 여자를 크게 신경 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평범하게 보지는 않았다. 밥 먹다가 친해진 덕택에, 타 부서의 회식과 야유회도 따라가고 임시 근무가 끝나고도 연락을 이어간 사람도 있다.


졸업 후 정식으로 직장을 다닐 때도 한동안 혼밥족으로 지낸 적이 있다. 조직원을 다 채우지 못한 신생 부서에서 근무하느라 혼자 밥 먹으러 가는 날이 얼마간 지속되었다. 수백 명을 수용하는 군대 분위기의 식당에서 낯선 남자들과 식사하던 일에 비하면, 남녀 비율이 엇비슷한 민간 회사의 구내식당은 한결 쉬웠다.


그렇게 내공을 쌓은 나의 혼밥 기술은 영국에 오니 장점으로 작용했다. 낯선 곳에서 남의 눈치 안 보고 밥 먹던 경험 덕택에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덜 탔다고 생각한다.


아침마다 학교로 가는 남편을 안심시켜놓고, 혼자 영국 탐험에 나섰다. 병원을 등록하고 도서관 카드도 혼자 만들었다. 구직 활동을 위해, 우리 동네 버스정류장도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낯선 동네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면접을 보기도 했다. 활동이 늘어나니 점심은 밖에서 먹어야 했다. 영국에 온 지 일주일도 안 된 유학생 남편의 아내 치고는 너무나 특이한 행보라 영국에서도 한동안 혼밥족이 되었다. 


그럼, 영국에서의 혼밥은 한국과 어떻게 다를까?


우선, 등급 조정부터 필요하다. 한국의 혼밥 중 가장 쉬운 단계로 취급하는 편의점 식사는 영국에서 체험하기 어렵다. 24시간 슈퍼마켓은 있지만 뜨거운 물과 전자레인지를 갖춘 식사 공간, 컵라면과 삼각 김밥 등의 편의점 메뉴가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시아인이 운영하는 상점에서나 볼 수 있으므로, 실천 난이도가 아닌 메뉴의 희소성 때문에 등급이 높아질 수 있다.


고기와 술이 나오는 고깃집, 횟집도 영국의 일반 식당에는 볼 수 없다. 대신, 영국식 술집인 펍 (Pub)에서 반주를 곁들인 식사는 할 수 있다. 식당 못지않은 다양한 메뉴와 아늑한 분위기까지 갖추어 초보들이 혼밥하기 좋다. 


뷔페식당과 패밀리 레스토랑은 평일 낮이라면 혼자 먹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혼밥 레벨 테스트에 넣더라도 초, 중급 단계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한국에서 보기 힘든 혼밥 유형이 있다. 


바로 길거리 혼밥이다. 




서양 문화에는 혼밥이 흔하다....사진 (왼) lifeafter9-5.com  (오) qz.com              


노숙자도 아니고 떡볶이나 토스트 등의 길거리 음식을 사 먹는 정도가 아닌, 거리에 앉아 혼자 식사를 하는 것이다. 


영국이라면 길거리 혼밥이 그리 어렵지 않다. 


일단, 누가 거리에서 뭘 하든 사람들이 신경을 안 쓰기 때문이다. 영국의 번화가에는 계단에 앉아 밥을 먹는 직장인을 간혹 볼 수 있다. 무릎이 드러나는 치마 차림으로 계단에 앉아 홀로 식사하는 여성의 모습에 살짝 충격을 받을 수 있다. 


내가 선호하는 길거리 혼밥 장소는 미술관 앞 벤치다. 개관 시간에 맞춰 줄을 서서 기다려 입장했다가 문 닫는 시간까지 미술관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내는 나를 우리 집 남자들은 이해 못한다. 같이 들어가자고 할까 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미술관만큼은 혼자 갈 때가 많으니 자연스럽게 혼밥의 시간을 가진다. 미술관 앞은 앉을자리도 많고 미술관 분위기에 맞게 화단과 조형물로 주변이 잘 꾸며져 있다. 다른 벤치에도 나처럼 밥을 먹거나 음료수를 마시는 사람,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까지 있으니 혼자라도 쓸쓸하지 않다.


영국에서 길거리 혼밥이 쉬운 또 다른 이유는, 음식을 들고 먹기 편하다는 점이다. 샌드위치나 햄버거는 말할 것도 없고, 일회 용기에 담긴 테이크아웃 음식은 어디서든 먹기 편하게 포장되어 있다. 


길거리 혼밥의 문제점이라고 하면, 어처구니없게도, 음료수 병을 따지 못하는 순간이다. 분명 손으로 따는 뚜껑이지만, 돌려 따기 까다로운 음료수가 간혹 있다. 식사 도중 마실 걸 포기할 수는 없으므로 이런 때는 주변을 잘 살피면 된다. 시야에 들어오는 남성 중 비교적 힘이 세 보이는 이에게 다가가 부탁한다. 뚜껑을 따느라 쩔쩔매는 남성을 몇 번 보았던 지라 상대가 곤란해지지 않도록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다.


이전 15화 영국에서 헌혈을 해보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