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숙진 Oct 11. 2021

지나친 기대도 실망도 없는 영국 차 (Tea) 문화

18년 전 처음으로 영국 땅을 밟기 위해 비행기를 탔을 때다.


승무원 - 차 드시겠습니까?
나 - 네에에에...(기대에 찬 표정으로)...무슨 차 있어요?
승무원 -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니 말없이 시커먼 액체만 부어주고 가버린다)

승객이 질문을 했으면 답을 해야 할 것 아닌가. 시커먼 물만 부어주고 그냥 가버리면 어떡하냐고.


차의 나라 영국에 오면 얼그레이를 비롯한 각종 차를 본격적으로 즐길 수 있겠지, 라는 내 기대는 영국행 비행기 안에서 1차로 무너졌다. 무뚝뚝한 표정의 남자 승무원이 말없이 건네는 블랙티를 받아 든 것이 나의 최초 영국식 차 경험이다. 이코노미 클래스에서 고급스러운 영국식 다과를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라고 자조까지 했다. 분명 더 멋진 차 문화가 나를 기다릴 거라 기대했지만 그 후로도 영국의 차 문화에 대한 나의 환상은 환생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영어로 'Tea'는 엄밀히 말해 차나무 (Tea plant) 잎을 가공하여 만든 음료에 해당한다. 동일한 잎이지만 이를 다르게 가공하면 우리가 잘 아는 녹차와 우롱차, 홍차 등이 탄생한다. 영국에서 Tea라고 하면 이 중에서도 주로 홍차를 가리킨다.


홍차 (紅茶)가 왜 영어로 Black tea인지는 영국인이 마시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뜨거운 물에 티백을 넣으면 곧바로 진한 색이 우러난다. 영국인은 이 정도로는 부족한지, 티스푼으로 티백을 눌러 짜거나 아예 탕약을 짜듯 실을 양쪽에서 잡아당길 수 있는 티백을 활용한다. 회사 동료 중 한 명은 뜨거운 물에서 건져낸 티백을 맨손으로 눌러 짜는 이도 있었다. 영국인이 티백을 눌러 짜는 모습에서 영국의 차 문화에 대한 내 기대가 또 한 차례 무너졌다.


블랙티뿐이니 영국에서 차를 대접할 때는 "무슨 차를 마시겠냐?"는 질문 대신 "차를 어떻게 마시냐"라고 묻는다. 설탕과 우유의 양을 조절해 마시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블랙티 밖에 못 마시겠구나, 라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한국에서 마시던 익숙한 차는 아니겠지만 영국의 카페에는 과일차와 허브차를 골고루 갖추고 있다. 현대인의 다양한 취향과 건강에 대한 관심에 맞춰 시중에도 각종 차가 나온다.



얼그레이라는 이름


영국의 차하면 ‘얼그레이’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특별한 차를 기대하겠지만 이것도 홍차의 일종으로 찻잎에 베르가모트 향을 가미하여 만든다. 고급 블랙티인 셈이다.


얼그레이 (Earl Grey)가 사람 이름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Earl’은 영국 영어로 ‘백작’이라는 뜻이다. <몬테 크리스토 백작 (The Count of Monte Cristo)>과 <드라큘라 백작 (Count Dracula)>처럼 영국을 제외한 다른 유럽에서는 백작을 'Count'라고 한다.


그레이 백작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차 이름이 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설 1...

1830년대 영국 총리로 재임하던 그레이 백작이 중국을 방문하던 중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준다. 목숨을 건진 이의 아버지가 보은 차원에서 총리에게 차를 선물한다. 당시 총리 관저에 차를 공급하던 업체가 이 중국차를 흉내 내어 만든 것이 지금의 얼그레이가 되었다.


설 2...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준 건 그레이 백작이 아니라 그의 수하인이다.


설 3...

사람을 구해준 건 아니고 총리가 중국 방문길에 차를 선물 받았다.


설 4...

사람을 구해준 건 맞는데 장소는 중국이 아니라 인도이며, 물이 아니라 호랑이에게서 구해냈다는, 다소 황당한 설이다.


설 5...

중국인이 블렌딩 한 차를 맛 본 그레이 백작이 이를 상업화시킬 것을 제안했다.


그레이 백작은 실제 중국에 간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 위 대부분의 설이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 얼그레이의 기원이 담긴 설을 주장하는 곳이 공교롭게도 각각 중국과 인도에서 차 원료를 수입해 판매하는 영국의 유명 차 회사다. 한국에서도 곧잘 불붙는 ‘원조’ 논쟁이 영국의 차 브랜드에도 전해진 것이다.



영국의 차 문화를 경험하고 싶다면, 애프터눈 티


영국식 차 문화를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애프터눈 티 (Afternoon tea)를 시도해보자. 집에서 준비하기는 번거로우니 잘 차려 입고 밖으로 나가보자.


harveynichols.com


판매 시간이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시간을 잘 맞추면 식사 대용으로 가능하다. 먹거리가 푸짐하기 때문이다. 위 사진은 런던의 한 레스토랑에서 제공하는 애프터눈 티 메뉴로 2인분에 해당한다. 주로 샌드위치와 케이크, 스콘이 종류별로 나온다. 차 대신 커피로 대체 가능하다. 호텔이나 고급 식당에서 볼 수 있는 메뉴이므로 가격이 저렴하지는 않다.


참고로, 영어 단어 Tea에는 차라는 뜻 외에도 오후 늦게 먹는 간단한 식사 혹은 저녁식사의 뜻도 있다.



차 못지않게 독특한 영국의 카페


"카페에 가서 아침 먹고 출근할게요"


영국의 한 드라마에 나온 대사다. 아침식사 준비를 깜박한 할머니를 향해 시무룩한 표정의 손자가 던진 말이다. 드라마 내용상 중요한 장면은 아니지만 영국의 카페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동네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이런 카페는 도시 번화가에 위치한 카페와는 사뭇 다르다. 식당에 더 가깝다.


영국의 동네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카페라는 이름의 식당 (사진: Reg's Cafe management)


지역에 따라서는 기사 식당의 분위기도 띈다. 나른한 오후, 소파에 몸을 기대어 음악과 차를 즐기거나 거래처 사람과 조용히 업무를 논의할 장소로는 부족한 점이 있다. 능숙하게 커피를 뽑아내는 바리스타의 솜씨를 기대할 수도 없다. 다만, 영국을 여행한다면 이런 카페에서 식사를 해볼 만하다. 지역 특산물을 맛보고, 동네 주민을 만나서 지역 정보를 얻는 행운도 누릴 수 있으니까.


이전 16화 혼밥 도전, 영국에서는 이렇게 해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