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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Jan 24. 2022

한국과 영국에서 경험한 "안 나가면 경찰 부릅니다"_1

"내가 전화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곤란해하는 사장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들린다.


시간에 맞춰 아르바이트 장소로 가던 중 확인 차원에서 내가 에이전시에 연락한 참이다. 월요일 9시까지 출근하라는 지시를 받은 후 당일 8시가 되도록 전화 한 통 없었다. 중간에 연락이 없으면 그 날짜와 시간에 맞춰 일하러 가는 것 아닌가?


통번역 일자리를 소개해주는 이 에이전시에 내가 처음 등록할 때만 해도 두 명의 친구가 공동 창업자이자 유일한 직원이었다. 이 두 사람을 편의상 A와 B로 부르겠다.


"오늘 9시까지 출근하라 해놓고 지금껏 연락 안 했잖아요. 그래 놓고 기다리라니 말이 됩니까? 당신이 소개해준 업체 사무실로 지금 가는 중이라고요."


"그 사무실은 다른 사람이 가기로 했어요."


이번 아르바이트 자리가 물거품이 되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다. 지금 통화 중인 A가 해당 업체에 나를 추천했지만 옆에 있던 B가 나를 못 미더워하면서 A와 B 둘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름을 감지했다. 일자리를 줬다가 뺏는 것은 사람 관계에서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아예 연락조차 안 해서 당사자를 헛걸음치게 만드는 건 더 무책임하지 않은가.


"나 지금 당신 사무실로 갈 테니 오늘 하루 허탕 친 거 보상하세요."


나는 아르바이트 업체로 가기 위해 탔던 전철에서 내려 다른 노선으로 갈아타고 에이전시로 곧장 향했다. 30여 분 후 에이전시 사무실에 들어서니 A와 B도 있고, 못 보던 여성까지 3명이 나를 올려다본다. 이미 사태를 짐작한 A는 자리에 앉아 나를 못 본 척 고개를 숙이는데 B가 나선다.


"전화 기다리라고 했는데 그렇게 무턱대고 출발하면 어떡해?"


예전에도 반말을 섞어 쓰던 사람이 이제 대놓고 반말로 시작한다.


"당일 한 시간 전까지도 연락을 안 해놓고 전화를 기다리라고요? 내가 5분 대기조예요? 다른 사람으로 교체한다고 미리 통보만 했어도 이런 문제가 없잖아요."


나도 이렇게 논리 정연하게 따질 때도 있구나, 스스로 감탄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나 도리에 어긋난 이들의 행태를 있는 그대로 나열했을 뿐이다.


나의 강경한 태도에 기가 죽은 A는 계속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 그래도 B는 물러설 수 없다고 나온다.


"안 되겠네 이 여자...어이 A 사장, 김 변호사에게 연락해. 공무집행 방해죄로 이 여자 고소하자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대화를 이어가려던 나는 갑자기 웃음이 터지려 했다. 이 조그만 회사가 이런 일로 연락할 '김 변호사'가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회사 크기로 무시하면 안 되니까 이건 접어두자. 설령, 변호사에게 연락한다 해도 왜 하필 공무집행 방해인가. 여기가 동사무소도 아니고 민간 기업 아닌가. 악덕 고용주에게 따지러 온 나를 고소할 명목이라도 있단 말인가?


B의 어처구니없는 제안에 A의 고개는 더 바닥을 치닫는다. 자기 말에 아무런 호응이 없자 갑갑해진 B는 옆에 있는 여직원에게 호소한다.


"어이 알바, 경찰 불러!"


남의 귀한 집 딸을 '어이 알바'라 부르는 사람과 대화를 시도하는 내가 한심했다. 그런 내 서슬에 질렸는지 B는 애꿎은 여직원에게 화풀이한다. 이 직원에게는 미안하게 생각한다. 평온하게 시작된 월요일, 어쩌면 이 여성은 갓 근무를 시작했을 수도 있는데 내가 오면서 소동이 벌어진 셈이다. 자신의 고용주 말을 거역할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이런 일로 경찰을 부를 수도 없다.


"어이 알바, 경찰한테 연락 안 하고 뭐해?"


성급해진 B는 전화기 옆에서 머뭇거리기만 하는 여직원을 밀쳐내고 직접 전화통을 붙든다. 그런데 당장 신고할 것처럼 엄포만 놓으며 계속 뜸을 들인다.


"지금 전화한다..."

"너 지금 안 나가면 경찰한테 전화한다..."

"그러면 경찰 곧바로 온다..."


고집부리는 아이에게 '경찰 아저씨가 와서 너 잡아가게 한다', 라고 으름장 놓는 못난 어른의 모습이 떠올랐다.


"네 하세요"


전화기만 붙들고 아무런 조치도 못 하는 B가 측은해서 이렇게 말했다.


결국 전화기를 집어 들고 복도로 나간 B가 뭐라고 신고했는지 모르지만, 경찰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그것도 4명이나 들어섰다. 건장한 남자 여럿이 들이닥쳐 사무실을 들쑤셔놔도 이토록 많은 경찰이 올까? 얼굴을 찌푸리며 들어선 경찰은 사무실 중앙에 앉은 나를 먼저 쳐다보고, 다음은 내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서있는 B를, 그리고 책상에 머리를 처박고 있다가 벌떡 일어서는 A를, 마지막에는 복사기 옆에서 얼어붙은 여직원까지 둘러봤다. 주변 사물도 살펴보는 듯하다. 혹시 난동을 피운 흔적이 있나 확인하는 것이리라. 신고 상황과 너무나 동떨어져 당황스러운가 보다.


그토록 도움을 호소하던 경찰이 출동했지만 B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겠군.


"경찰 아저씨들, 이런 일로 오시게 해서 죄송한데 여기 좀 앉아 주시겠어요."


다들 어쩔 줄 몰라했다. 지금껏 모든 걸 지켜본 사무실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갑작스레 출동한 경찰 4인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려는지.


"이 사람들이 저에게 오늘 9시까지 아르바이트 업체에 출근하라 해놓고, 이제 와서 갈 필요 없다고 하잖아요. 그것도 오늘 8시에 제가 직접 연락해서야 그런 말을 하네요."


"아...그건...저희가...

저희가 나서서...

저희가...해결해드리기 힘든데...

노동청이나...그런 쪽으로...

다른 곳에 문의하시는 것이..."


4명 중 연장자로 보이는 경찰이 맞은편에 앉더니 나를 달래려 하지만 말끝을 계속 흐린다. 그러자 B가 다급하게 나온다.


"아까, 제가 찬찬히 설명하는데, 이 여자가 계속 난동을 피우고..."


'난동을 피우던' 여자는 침착하게 테이블에 앉아 경찰과 대화를 시도하는데, 피해자 행세하는 B는 경찰에게 의지하지도 못하고, 이젠 쓸모 없어진 이들을 쫓아내지도 못하고 초조해진 모양이다.


"사장님께서 이런 일로 경찰을 부르면 곤란하지요. 두 분이 말씀을 잘하셔서..."


경찰은 어떻게든 참견하고 싶겠지만, 범인 검거를 하러 온 사람이 나에게 무얼 하겠으며, 이곳이 노동청 상담소도 아니지 않은가. 경찰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신고 사항이 되도록 원만하게 해결되기를 바랄 수밖에.


엉뚱한 신고자 때문에 단체로 출동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경찰들이 안쓰러워서라도, 또 이들의 부재로 발생할 수 있는 다른 치안 문제를 고려해서라도, 나는 계속 버틸 수가 없었다. 대신, 그동안 약속 날짜도 없이 기다리기만 하던 번역 아르바이트비를 급속도로 받아내는 결실은 얻었다. 경찰들은 그런 나에게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돌아갔다. 모든 일이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King's Church International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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