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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Aug 02. 2021

영국에서 얼떨결에 모델 알바를 뛰던 날

영국에서 만난 사람

"....&*(_>&....%6^$....Y#\#@.............헬프 미....!"


"............?"


"....&*(_>&....%6^$....Y#\#@.............헬프 미....!"


"........................................???"



처음 보는 남성이 내게 다가와 도움을 요청했다.


요즘 세상에 낯선 사람이 다가와 무언가 부탁을 한다면 무조건 경계부터 해야 하겠지만, 인파로 붐비는 대로 한복판에서다. 도움이 절실해 보일 뿐 남성의 인상이 그다지 나빠 보이지 않았다 (나쁜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건지는 모르지만).


영국에서도 사투리 심한 곳으로 손꼽히는 지역에 살던 때다. 내가 영국에 첫 발을 디딘 곳이요, 덕분에 영어를 전공하고도 영어 듣기 훈련을 혹독하게 다시 받아야 했다. 이 지역 영어에 익숙해질 무렵 인도식 영어, 스코틀랜드 사투리는 편안하게 들렸다. 


물론, 이 지역 주민의 말을 알아듣기 시작한 건 나중 일이고, 위 만남이 이루어진 시점은 내가 영국에 온 지 얼마 안 될 무렵이다. 같은 지역 사람이라도 사투리 억양은 조금씩 다르기 마련이다. 내가 만난 남성은 지나치게 사투리가 심한데다 수줍음을 타는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일관했다.


경상도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하면서 경남/경북/부산 사투리의 미묘한 차이를 구별하던 나로서는 친근하게 다가 온 지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살면서 되도록 사투리는 쓰지 않겠다 결심하게 된 곳이기도 하다. 외국인은 말할 것도 없고 자국민조차 이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절망감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남자와 몇 차례 더 소통을 시도했지만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자기 사투리가 심한 편이라고 연신 사과했지만, 그 말 외에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남자의 간절한 눈빛도 있고 숫기 없는 남자가 겨우 용기 내어 낯선 여자에게 부탁하는 듯하여 안쓰러웠기에, 일단 그가 하자는 대로 해보기로 했다. 사람들로 붐비는 시내 한복판에서 처음 만나는 외국인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이라면 뭔가 중대한 사유가 있을 것 같았다.


이 남자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시내 한 백화점이었다. 우리가 서있던 거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으며, 나도 한 번씩 들르던 곳이다.


백화점 진열대 사이를 조용히 앞장서 걷기만 하던 남자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대형 체중계 앞에서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영국의 번화가 어디에나 하나쯤 있던 이런 체중계는 동전을 넣고 사용하는 식이다. 좀 더 정교한 체중계는 종이 인쇄물이 나오기도 했다.


이 남자가 대뜸 동전을 주더니 나더러 체중계 위에 올라가 보라고 했다. 처음 보는 여자에게 이 얼마나 황당한 요청인가. 


나는 이미 도와주기로 약속을 했고 여기까지 자발적으로 따라왔으니 돌아설 수도 없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수시로 지나다니고 CCTV까지 우리를 감시하고 있으니 위험한 일은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대신, 민망한 일은 일어날 것 같았다. 낯선 남자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것도 무안한데 내 몸무게까지 공개해야 하다니.


에라 모르겠다 싶어 남자가 시키는 대로 했다. 


처음에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 동전을 넣자마자 체중계가 동전만 삼키고 작동을 하지 않았다. 남자가 한숨을 쉬더니 다시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줬다. 처음 사용하는 기기라 또 실수할지 모르니 남자더러 작동시켜 달라 요구했지만 내가 직접 해야 한다고 나왔다.


이 지시사항을 이해하기까지 남자는 예의 암호 같은 사투리를 내게 수 차례 반복해야 했다. 다행히 아까 거리에서의 대화보다는 이해가 쉬웠다. 이미 체중계 앞까지 왔으니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파악된 셈이니까. 


내가 할 일은 알겠는데, 하필 영국의 거리에서 그 많은 영국인들을 제쳐두고 처음 본 아시아계 여자에게 부탁하는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절실히 묻고 싶었지만, 그런 깊은 대화를 나누기에 둘 사이의 언어적 장벽이 너무나 높았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앞뒤 문맥으로 파악한 말이지만, 양로원에서 생활하는 노인을 위해 체중계 사용법을 포스터로 제작하는 중이라고 했다. 


체중계 사용법을 사진으로 설명하기 위해 


1. 내가 동전을 집어넣는 모습

2. 신발을 벗고 체중계에 올라서는 모습

3. 버튼을 눌렀을 때 정보가 뜨는 화면

4. 정보가 담긴 종이쪽지가 인쇄되는 과정

5. 내가 쪽지를 확인하는 모습


이렇게 여러 차례로 나누어 남자가 사진을 찍었다.


필요한 사진을 다 찍고 나니 흡족해진 남자가 내게 또 뜬금없는 말을 했다. 다행히 이건 쉽게 알아 들었다. 문장이 간단하기도 하지만 만국 공통어인 지갑을 꺼내 보여서다. 물론, 이 때도 숫기 없는 남자의 머뭇거림이 느껴졌다.


"돈 얼마 받을 건가요?"


돈 받고 하는 일이란 말인가. 


낯선 남자가 도와 달라는 호소에, 그것도 양로원에서 생활하는 노인을 위한 일이라는 말에 마음이 약해져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돈까지 받아야 하나 싶었다. 이 남자의 목에 걸려 있던 고급 카메라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사진작가 치고는 모델 선정 과정이 허술하다만, 어쨌건 그도 내 사진을 가져가 돈을 버는 거겠지,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큰 키 덕택에 의류학과 졸업 작품전 모델이 되기도 하고, 거리에서 만난 의류학과 학생의 요청으로 사진이 찍힌 적도 있다. 모델해보지 않겠냐며 내게 명함을 건네는 사람도 있었다. 영국에서는, 벤치에 앉아 있는 우리 부부에게 접근해 학교의 프로젝트 수행에 협조해 달라며 사진을 찍어간 학생도 있다. 


낯선 이들에게 사진을 찍힌 적은 있지만 돈을 받은 경험은 없던 내가 말도 안 통하는 이 남자에게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제가 전문 모델 경험이 없어서..."

"그럼 이 정도면 되겠어요?"


영국에서 난생처음 예정에도 없던 모델 알바를 뛰고는 20파운드를 받았다. 


하...

아무리 파운드가 2천 원에 육박할 정도로 가치가 뛸 때라도 그 돈은 쫌...

하지만...

협상할 틈도 안 주고 남자는 떠나버렸다.


* 혹시나 영국의 양로원이나 공공시설에서 키 큰 아시아계 여자가 체중계에 올라선 모습이 담긴 사진을 발견하면 제게 연락 좀 주세요 ^^ 제 사진이 어디에 돌아다닐지 궁금해요.


커버 이미지:  Photo by Khaled Ghareeb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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