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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Jun 23. 2023

프랑스에서의 만남, 매미로 시작한 대화가 6.25까지

"저게 무슨 소리지? 꼭 압력솥에서 김 내뿜는 소리 같다."


작년 여름 마르세유를 여행하던 중이었다. 일정이 미리 정해져 있던 남편은 혼자 약속 장소로 향하고 두 모자만 여행길에 올랐다.


르빠니에를 방문했을 때다.


프랑스어로 바구니 (Le panier)라는 뜻을 지닌 동네로 마르세유에서도 특히 더 독특한 문화 색을 자랑했다. 바구니 한가득 다양한 문화를 모았다는 의미일까? 거리 곳곳에 보이는 담벼락 낙서와 칠 벗겨진 낡은 건축물마저 고풍스러운 매력을 발산했다. 


집이며 식당이며, 상점까지 건물 입구에다 선인장을 내놓은 곳이 많았다. 늘 습하고 일조량도 적은 영국에서라면 통유리로 된 온실에서나 키울 수 있을 커다란 선인장이다. 알로에가 잡초처럼 자라는 곳도 있었다. 마르세유 땅에 내려서자마자 숨 막히게 다가오던 고온건조한 기후가 이런 문화를 만들어내는구나 싶었다. 




거리의 진귀한 식물에 이어 장난감처럼 다닥다닥 붙은 집과 상점 건물에 홀려 이곳저곳을 감상하다가 갑자기 길 한복판에 물이 쏟아져 나오는 통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증기를 내뿜는 소리가 들렸다. 식당이 밀집한 곳에서 특히 소리가 크길래, 주방에서 압력솥을 쓰는가 짐작했다. 


밥 짓는 소리가 거리로 흘러나올 정도로 큰 솥을 쓴단 말인가? 

한국도 아닌 프랑스에서? 

해산물과 스테이크 요리로 유명한 지역에서?


야외 테이블에 앉아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내 의문이 어느 정도 풀렸다. 압력솥 소리라 짐작했지만, 정작, 솥이 들어가야 할 내부가 아닌 야외에서 더 크게 소리가 들렸다. 더 정확히는, 우리가 앉은 테이블 옆 나무 꼭대기에서 말이다. 분명 기계음이 아닌 자연의 소리다. 여전히 그 정체는 모르지만.





"그게 매미라고요? 한국에도 매미 많은데 소리가 전혀 달라서 몰랐어요."


낯선 남성과 대화를 나누며 내가 한 말이다.


한국에서 듣던 '맴맴맴'이 아닌 '씩씩 쌕쌕'의 매미라니. 나중에 조사해 보니, 프랑스 남부에만 15종의 매미가 산다고 한다. 내가 들은 압력솥 매미가 한국에도 서식한다면, 우리는 아마 매미가 아니라 씩씨기라고 부르지 않을까.


거리 열차를 타고 마르세유 외곽과 노트르담 성당까지 가보기로 한 날이다. 


지구력 하나 끝내주는 두 모자가 걷겠다고 나서면 반경 10km 내에 못 갈 곳이 없다만, 36도가 넘는 폭염이 내리쬤다. 끝없이 펼쳐진 해변을 지나고 성당에 이르는 언덕 꼭대기까지 멀쩡히 걸어 도달할 자신이 없었다. 특히, 아들은 전혀 경험해보지 않은 혹독한 더위를 뚫고 말이다. 




시내 중심을 도는 1번 열차를 타고 출발했다가, 11시 조금 전 출발점으로 돌아왔지만 12시가 다 되도록 2번 열차는 운행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1번 열차에 비해 수요가 떨어지는 건지, 시내 외곽을 도는 2번 열차는 운행 시간이 명확하지 않았다. 길게 줄이 이어질 정도로 승객이 모였음에도 뒤이어 들어온 1번 열차를 먼저 보내주는 식으로 출발을 지연시켰다. 


이런 식으로 2번 열차를 기다리다가 흥미로운 사람을 만났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금발의 남성이 아들에게 프랑스어로 말을 걸기 시작하면서다. 


아들은 또래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배웠고, 그동안 쌓은 프랑스어 실력을 마르세유에서 발휘하겠노라 잔뜩 기대하던 차다. 이런 때 프랑스인과 대화를 나누다니 기특하게 여겨지긴 했지만, 고등학생 실력으로는 원어민과 긴 대화가 쉽지는 않을 텐데... 더군다나 같은 프랑스인도 소통에 힘겨워하는 마르세유에서.  


나의 짧은 프랑스어 실력으로는 둘의 대화를 알아듣기 힘들지만, 뭔가 이상했다.


우선, 프랑스인 특유의 콧소리가 거의 없었다. 이건 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배운 아들에게서 발견한 점인데, 영국에서는 프랑스어의 P, T, K를 경음이 아닌, 영어식 격음으로 발음하는 경우가 있다. 한국인이 영어의 F와 P 발음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결정적으로 나의 의심을 자아낸 건 대화 속 단어를 통해서다. 


GCSE 

A-level


각각 영국의 수험생이 치르는 졸업시험이다. 아무리 외국인이 붐비는 지역이라 해도, 영국의 졸업시험에 대해 프랑스인과 대화 나눌 일이 있단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이 남성은 프랑스인이 아닌 영국인이었다. 영국인 윌리엄.


프랑스 여행의 목적은 본인이 털어놓지 않아서 모르나, 윌리엄이 프랑스어 실습 대상을 고르다가 아들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누가 봐도 아시아계로 보이는 내 아들이 영국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한 건 어떻게 알고 말이야.


시간이 계속 흐르면서 대화에 끼지 못하는 내가 무료해 보였는지 갑자기 윌리엄이 나를 향해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낯선 사람과 이야기 나눌거리도 마땅치 않은 데다 여행에만 집중하고픈 내겐 그다지 할 말이 없었다. 선배 여행자로 르빠니에를 구경하고 온 경험이라도 들려줄까 싶었다. 


나무 주변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들었노라 했더니 윌리엄이 매미의 존재를 언급하면서 우리의 대화 분위기가 급변했다. 한국 출신이라는 내 말에 그의 눈빛부터 달라졌다. 그전까지만 해도, 나를 빼놓고 대화에 몰두하는 것이 미안해서 형식적으로 말을 건다 싶었지만, 이제는 아예 나와의 대화에만 몰두하려는 듯싶었다. 


한국인 여자친구와 사귀는 동안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다는 윌리엄은 여자친구와 헤어지고도 한국 음식이 그립다고 했다. 특히 김치찌개를 좋아해서 지금도 어설프나마 만들어 먹을 정도라니. 외국인에게는 꽤 어려운 단어인 '김치찌개'를 명확하게 발음하는 것도 신기하다만, 김치처럼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을 좋아하는 건 더 신기했다.



"함경도 출신 할머니가 요리를 엄청 잘했어요. 매일 아침마다 얼마나 많은 음식을 내놓는지..."


윌리엄이 여자친구 할머니집에서 지낸 경험을 들려줬다. 


한국의 아침식사 풍경에 대한 회상에 이어 할머니가 고향을 그리워하더라는 말도 나왔다. 


할머니의 고향 때문인지 아니면 당시 남북한 관계가 뉴스를 장식해서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윌리엄과의 대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두서없이 흘러갔다.


한국 출신이라고?

남에서 왔니? 북에서 왔니?

왜 고향에 못 가?

전쟁은 왜 시작되었는데?


이후 이산가족 찾기, 북한 핵문제까지 이어졌다. 한국의 역사를 잘 모르는 이가 흔히 하는 질문이긴 하지만, 한국인과 사귀고 한국에도 다녀왔다는 윌리엄은 한국에 대해 조금은 더 알지 않을까 의문이 들긴 했다. 


상대 얼굴에 침이라도 튀기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계속 말을 이어가야 했지만, 이를 개의치 않고 윌리엄은 진지하게 질문하고 열심히 내 말을 들어줬다. 


우리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그토록 기다리던 2번 열차는 우리 일행을 태우고 출발했다.

파란 바다와 새하얀 모랫빛에 눈이 부셔서 한 번씩 돌아보기는 했지만 그게 다다.

해변을 따라 달리는 건 알겠는데 우리가 어디를 지나는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 유명한 이프성도 지나가고 중세 건축물과 화려한 요트로 둘러싸인 항구도 나왔지만 이를 온전히 즐기지 못해 아쉬운 열차 여행이다. 하지만, 한국에 대해 이토록 관심을 가지는 외국인을 만나는 건 언제든 반가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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