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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Jun 20. 2024

아침마다 아들에게 '하지 마'라고 외치는 연습을 시켰다

- 예전 글을 새롭게 다듬어 올립니다 -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운동장에 모여든 다른 부모들과 함께 학생들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몇 분 뒤, 잠긴 출입문을 열어주려 나서는 교장선생님의 얼굴이 보이는가 싶더니 곧이어 저학년 학생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와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유리창 너머로 소리와 움직임만 감지이들의 모습여전히 드러나않았다. 키가 작아서 철문 위 유리창까지 얼굴이 닿지 않아서다.


닿지도 않는 작은 키로 자신의 부모가 창밖에 보이나 싶어 기를 쓰고 발을 뻗어 문에 매달리는 바람에 코와 입이 납작해진 아이들의 모양새가 애처롭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몇 분 뒤 이 아이들보다 조금 더 큰 고학년 학생들까지 모습을 드러내자, 1층 중앙 현관은 학생들로 터져나가기 일보 직전이 되었다. 교장선생님이 문을 여는 동시에 다들 한꺼번에 바닥으로 쓰러지지나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아들은 평소에도 가방과 소지품 정리에 시간이 걸리는 편이라, 나는 조급해하지 않고 다른 학부모들보다 뒤편에 서서 기다렸다. 뒤로 물러나 있더라도 한중일 아시아계가 거의 없는 학교에서 내 아들 찾기는 일도 아니다 싶어서.


오늘도 늦게 나오겠지 하고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는데, 이날은 웬일인지, 아들이 평소보다 더 일찌감치 나왔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아들의 출현이라 나는 당황해하며 군중들 사이를 빠져나가 앞으로 다가가야 했다. 


아... 

그런데 아들의 얼굴이... 


더운 날씨에 흘린 땀에다 흙까지 묻혔는지 땟국물처럼 검어진 왼쪽 뺨을 타고 눈물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20여 분의 하굣길에 나설 때마다 아들이 전하는 그날의 일과를 들으며 걸음을 옮기는데 이날은 긴 얘기가 될 것 같았다.


다행히 아들은 머뭇거리는 듯하면서도 속내를 천천히 털어놓았다.


수업 도중 친구가 아들의 얼굴을 겨냥해 지우개를 계속 던졌다고 한다. 다칠 정도는 아니지만 장난을 멈추지 않으니 참다못해 울음을 터뜨린 모양이다.


아들을 괴롭힌 제임스는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로 가족끼리도 아는 사이다. 우리 집에 놀러 온 적도 있어서 가까이 관찰해 볼 기회가 있었다. 행동이 활달한 편이지만 누군가를 괴롭힐 정도로 난폭해 보이지는 않았기에, 아들 말에 당황했다. 


아이들에게는 어른이 모르는 세계가 있을 테다. 물리적 폭력을 가하지 않더라도 물건을 뺏거나 왕따를 시키는 등 초등학생이 견디기 힘든 괴롭힘이 있을 수 있다.



"제임스가 지우개 던질 때 너는 뭐라고 했니?"


아들은 가만히 지켜만 봤다고 한다. 아무 말도 않고 친구의 행동을 내버려 뒀다가 도저히 감당 못하자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제임스에게 그만두라고 왜 말하지 않았냐 했더니, 친한 친구에게는 그런 말 하면 안 되는 걸로 생각했단다. 싫다는 의사표시를 하지 않으면 상대는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던 행동을 멈출 이유가 없다. 남의 얼굴에 물건을 던지는 행동이 나쁘다고 하는 어른의 상식이 아이에게 자리 잡혀 있지 않을 수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접근할지 조금 고민이 되었다. 아들의 친한 친구이자 착한 아이라 여겼던 제임스의 엉뚱한 태도도 그렇지만 친구의 나쁜 행동을 저지하지 않는 아들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들과 긴 대화가 필요할 듯했다. 


아들이 태권도를 배우던 시절이기에, 싫은 행동을 하는 친구가 있으면 태권도에서 구호를 외치는 것처럼 소리쳐보라고 아들에게 제안했다.


살살 말로 해도 되는 걸 큰 소리로 외치게 한 건, 당시 아들의 유약해 보이는 태도 때문이었다. 태권도 구호처럼 '하지 마'라고 외치는 것을 평소에 연습해 두면 감정 조절도 되면서 상대를 멈칫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으리라 기대했다. 물론, 태권도 실력으로 친구를 때리는 건 안 된다고 늘 강조하던 나였다. 


다음 날부터 등교를 앞두고 두 모자의 소리 지르기 운동이 시작되었다.


NO 

STOP IT 

DON'T DO THAT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친구에게 큰 잘못을 저지르는 건 아닌가 우려하는 아들이었다. 친구가 던진 지우개에 맞을 때 보다, 친구에게 싫다고 말하라는 내 요구에 더 괴로워할 정도였다.


친구의 괴롭힘에 아무 말 못 하고 우는 것보다 낫겠다 싶었는지, 아들은 망설이면서도 엄마의 구호를 따라 했다. 


이 구호 외치기 덕택인지는 모르겠으나, 친구의 괴롭힘으로 아들이 울고 오는 날은 더 이상 없었다. 나는 이 정도 변화에 안심하지 않고 학교에서의 생활에 관해 수시로 대화를 나누며 아들에게 변화가 있는지 관찰했다.



아들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사오기 전 아들이 다른 초등학교를 다니던 때다.


부모의 높은 교육열로 인해 아시아계 학생이 대체로 다른 학생보다 성적이 뛰어난 편이다 보니 이를 경계하는 학생이 있다. 비뚤어진 시기심으로 아시아계 학생을 놀림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영어가 어눌하거나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왕따를 시키기도 한다. 다행히 아들은 이런 일들로 괴롭힘을 당한 건 아니다.


아무에게나 시비를 걸고 거칠게 대하는 톰이 벌인 소행이다. 톰의 부모를 간접적으로나마 아는 나로선, 누구에게나 관심을 끌려 엉뚱한 행동을 하는 톰이 오히려 측은하게 여겨졌다. 아들도 톰의 거친 행동을 귀찮아 하긴 했지만 괴로워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당시 학교 생활을 가장 그리워하는 편이다. 매번 '이번에도 톰이 시비 걸었나 보지?' 하며 아들과 함께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 어딘가에 있을 톰과 그의 부모를 향해 혀를 찼다.


입학 당시 같은 반을 이루었던 친구들이 거의 몇 년간 급우로 남기에 톰의 괴롭힘이 잦았다기보다 아들을 괴롭히는 대상이 톰으로 한정되었다는 편이 더 가깝다. 


보조 교사 두세 명이,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곁에 서서 감시하다가 아이가 다치면 응급조치를 하고 그 내용을 기록해 부모에게 전달한다. 싸움이 벌어지면 이에 가담한 아이들을 저지하고 내용에 따라서는 부모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감시망에 금방 걸려들기 때문에, 나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덜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괴롭힘을 당했다고 아들이 말하는 날과 그날 내게 전해지는 교사의 쪽지 내용은 일치했다. 


나는 학교에서 누군가 때리더라도 맞받아치지 말라는 비폭력주의를 아들에게 강조했다. 괴롭히는 아이가 있으면 소리쳐서 주변에 알리라고만 했다.  


학교 폭력에 대응하는 방식에서 남편은 나와 의견이 달랐다. 자신을 때리는 이를 가만 두는 건 말도 안 된다, 는 반응이었다. '남자의 세계에서~~'라는 말로 남편이 강조하는데, 만일 우리에게 딸이 있었으면 어떤 반응을 했을지 궁금하다. 


아들이 톰에게 또 맞았다고 하던 날, 남편은 어린 아들의 목욕을 거들어준다는 핑계로 욕실에 들어가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았다. 



두 남자가 목욕탕 토크를 나누고 난 뒤...



"무슨 이유로 싸웠는지, 누가 먼저 싸움을 시작했는지, 둘 다 전혀 말을 안 하네요."


아주 갑갑해하는 목소리로 담임 선생님이 내게 토로했다. 아들과 톰 사이에 벌어진 일을 두고 한 말이다. 


늘 거친 행동을 일삼는 톰은 그렇다 치더라도, 평소 얌전하던 아들의 돌발 행동에 선생님은 놀란 듯하다. 하지만, 더 이상 문제 삼지는 않았다. 


아빠에게 뭐라고 들었는지 모르지만 아들은 이제 톰에게 맞기만 하지 않겠다 작정한 모양이었다. 


남편의 접근법이 걱정되긴 했지만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남편과 나, 또 누구의 방식이라도 100% 완벽한 건 없으니까. 다만, 아빠의 주장을 잘못 해석해 아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돌변할지 모른다는 우려는 있었다. 


다행히 그 후 아들이 가해자가 되는 일은 없었고, 더 이상 톰에게 맞고 오는 일도 없었다.


* 글에 언급된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Mikhail Nilov on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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