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숙진 Jun 13. 2024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이웃 2

이 글을 쓰기까지 며칠간 고민을 했다.


지난주에 이어 이웃집 이야기를 또 하려니, 지금도 떠올리기만 하면 치가 떨릴 만큼 싫었던 과거를 상기하려니, 걱정이 되어서다. 누구든 가벼운 마음으로 읽으라고 쓰는 글인데 오히려 암울한 분위기로 읽는 분에게 내 나쁜 기억을 전가하는 건 아닌가 해서다.


그럼에도, 일말의 희망을 가져보기로 했다. 


나처럼 황당한 이웃을 만나 곤란을 겪더라도 문제 해결의 여지가 있다는 희망을 주고 싶으니까. 황당한 경험이든 슬픈 경험이든 글로 적어 옮기는 과정에서 나름의 상처도 치유하고, 이 글을 읽는 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있다.



"문 열어 이 XX야!"


침대에 막 누우려 할 무렵 창밖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고함이라 하기엔 불확실한 것이, 동네가 조용한 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 드릴이나 잔디 깎이처럼 엄청난 소음과 진동까지 동반하는 기계를 쓰지 않는 한 웬만해서는 집 내부까지 소리가 크게 전달되지 않기에 밖에서 얼마나 큰 소리를 내는지 당장 판단하기 힘들어서다. 


뭔가를 외치고 있기는 한데, 술에 취했는지 흥분했는지 횡설수설하는 바람에 금방 알아듣기 힘들었다. 


집중해 들어 보니


"Open the fXXXing door!"


이렇게 반복해 말하고 있었다.


사전에 실리는 단어라고 해서 누구나 다 쓰는 건 아닐 텐데, 영국에 와서 이 정도로 거친 욕설과 괴성을 직접 들어보는 건 처음이었다.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나 범죄 현장을 누비는 경찰의 24시간을 다루는 TV 방송에서나 들을 법한 소리였다. 


커튼을 살짝 열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내다봤더니, 세상에, 한 남성이 옆집 문 손잡이를 붙들고 난리부르스를 추고 있지 않은가. 손잡이를 잡아당겨도 소용이 없자 문을 두드리다가 또 아까처럼 욕을 하는 일련의 행위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 놓인 커다란 가방과 옷차림으로 보아하니 방금 비행기에서 내린 듯했다.


온 동네가 잠에 들었을 밤 12시에 그것도 평소 아무도 난동을 피우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마을에서 누가 이토록 상스러운 욕을 하며 난리를 친단 말인가. 


이 남성이 문을 두드리는 집, 즉 우리 바로 옆집에는, 그리스 출신의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우리 가족이 이사 온 첫날 그 집 아내인 D가 먼저 다가와 자신을 소개하더니, 앞으로 우리 가족이 정착하는 동안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빌려가고 동네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어도 물어보라고, 호의를 베풀었다. 


영국에 온 이후 남편의 학업과 직장 때문에 열 번도 넘게 이사 다녀봤지만 이토록 친절하다 못해 천사 같은 이미지를 풍기는 이웃은 처음이었다. 물론, 다른 곳에서 만난 이웃도 대부분 좋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의 1탄에 나온 L은 빼고). 


그런 천사 같은 이미지의 부부와 어린아이까지 사는 집에 밤 12시가 넘어 들이닥친 것도 모자라 문을 두드리며 욕설을 하다니 충격 그 자체였다.


세상에는 천사 이미지 속에 범죄의 습성을 숨기고 사는 사람도 있고, 선대에 벌어진 일에 대한 집착으로 저지르는 복수 행위도 있으리라. 남녀 사이의 치정에 얽힌 사연도 있지 않겠는가. 하다 못해, 조심성 없는 친구 때문에 곤욕을 치를 수도 있고.  


중요한 건, 소리를 지르며 분풀이해야 할 정도의 일이라 하더라도 그토록 늦은 시간에 조용한 주택가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행위는 정당화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해당 집에 거주하는 사람은 물론 주변 주민에게까지 피해를 끼치는 행위다. 


나는 천사의 얼굴을 한 옆집 부부에게도 무슨 사연이 있겠지 하며 애써 외면하려 했다. 욕설을 하며 문을 두드리는 남자가 제풀에 지쳐 그만두거나 곧 경찰이 출동해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간절히 빌며 잠들었다. 


이웃 사람으로서 너무나 소극적인 대처가 아닐까 싶지만, 다음 날 일찍 일어나 가족 모두 바쁜 일상을 준비해야 했다. 무엇보다 옆집 부부가 이런 미치광이 하나 정도는 처리할 능력은 있으리라 믿었다. 다행히, 커튼 사이로 살짝 비쳐 들어오는 바깥 풍경에 낯선 불빛이 쉴 새 없이 번쩍이는 걸로 보아 곧 경찰이 출동한 것 같았다.


다음 날 오전,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S를 만났다. 옆집에 사는 부부 남편이다. 


그를 멀리서 발견하는 순간 두 가지 심정이 내 머릿속에 교차했다. 


천사 이미지와는 대조될 정도로 악랄한 과거가 이들 부부에게 숨겨져 있거나 혹은 치정에 얽힌 비화로 인해 어젯밤 난리가 벌어진 거라면 S가 나와의 만남을 꺼리지 않을까 하는 심정이었다.


한편으로는, 미치광이의 갑작스러운 출현으로 무고한 가족봉변을 당했을 거라는, 그래서 이웃인 내가 나서서 위로해야 한다는 심정도 들었다.



"집주인이 한밤중에 나타나 문 열라고 난리 치잖아요."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대신, 그의 아내는 괜찮냐며 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당시 출산한 얼마 안 되는 D가 제일 걱정되어서다. 


S는 내 의중을 알아채고는 어제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해 줬다. 6개월마다 월세 계약을 갱신해야 하는데 이들 부부는 계약 연장을 하려 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주인 측에서 거부하더라는 것이다. 방을 빼라는 부동산 사무소 측의 연락을 받고 어떻게든 계약을 연장해 달라 사정하던 차라고 했다.


그런 와중에 아무런 통보도 없이 집주인이 들이닥쳤다고 한다.


몇 년 전 태국으로 건너가 살고 있던 집주인은 영국에 있는 이 집을 부동산 사무소에 맡겨 관리하던 중, 고국을 찾은 것이다. 세입자가 이 무렵 계약을 종료하고 집을 비웠겠거니 짐작하고 온 모양이다. 전후 사정이 괴상하긴 하지만, 속속들이 더 캐물을 수는 없으니 S가 자발적으로 털어놓는 내용으로만 이해할 뿐이다.


영국에서는 월세가 밀린 세입자는 물론 주인 몰래 들어선 불법 거주자라 해도 강제로 쫓아낼 방안은 없다. 법원에 신청해 퇴거 명령을 거쳐야 하는 일이다. 더군다나, 이러한 절차를 거쳐 강제 퇴거 명령이 내려진 집이라 해도 한밤중에 문을 강제로 열게 해서는 안 된다.


아내와 남편 모두 의사인 S 부부가 월세를 미루거나 세입자 규정을 크게 어겨가며 말썽을 부리고 살았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부동산 관계자가 수시로 들락거리며 주변 분위기를 어수선하게 만들었으리라.


집 관리를 하는 부동산 사무소와 집주인 사이에 어떤 오해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월세 계약이 끝날 무렵, 세입자에게 이를 서면 통보하고 파손된 기물이 있는지 조사하고 계약금을 환불해 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세입자가 보관하고 있던 집 열쇠도 반환시키고 새 세입자를 맞이할 수 있도록 청소도 해야 한다. 결코, '어, 아마 세입자가 나갔을 건데요'라고 어설픈 정보를 건넬 정도도 가벼운 사안이 아니다. 


그럼에도, 한밤중에 나타나 문 열라고 했다면 누가 어떤 정보를 잘못 전달했든 그래서 오해가 발생했다 하더라도 집주인의 잘못이라 할 수밖에 없다. 물론, S가 내게 털어놓지 못한 다른 사정이 있을 수도 있지만. 


신고로 출동한 경찰이 집주인을 주거 침입죄로 고소해도 된다고 했지만 S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집주인 경찰과 함께 돌아갔다고 한다. 


한밤중의 소동은 이런 식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아내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바람에 도저히 못 살겠다고 해서 다른 거처로 옮기기로 했다고 S가 전했다. 이후 이들 가족은 트럭에다 짐을 실으러 때 말고는 다시 나타나않았다. 우리가 정말 복에 겨울 정도로 좋은 이웃을 만났구나,라고 행복해하는 순간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집주인이 그 후 어떤 처분을 받았는지, 다시 태국으로 돌아가 살고 있는지 전혀 궁금하지도 않은 채 세월이 흘렀다. S의 가족이 나간 후 얼마 안 되어 새로운 가족이 들어서고 이들 또한 6개월인지 1년인지 지나니 집을 떠났고, 뒤이어 다른 가족이 들어서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세입자가 바뀌는 틈에 한 번씩 중년 남성이 옆집을 들락거리는 모습이 보이곤 했는데, 행동으로 보아하니 집주인인 듯했다. 그 예전 한밤중에 커튼 틈으로 보았던 모습은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매번 여름이 되면 이 집에 들렀던 것 같다. 마침 그 시기가 세입자를 새로 들이는 시기와 맞물리고 하니 태국에서 살다가 피서 차 영국에 와 머무는 길일 수도 있다.


중년의 나이에 경찰에 불려 가 훈계를 제대로 받은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밤늦게 그가 보인 추태는 다시 볼 수 없었다. 새로운 이웃이 들어설 때마다 이들이 집을 꾸미는 통에 망치로 두드리고 드릴로 뚫느라 늘 새 이웃 맞이 의례를 치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오히려 나의 걱정은, 매번 이웃이 이사 나갈 때마다, 이번에는 집주인이 태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본국으로 돌아와 이 집에 눌러앉는 건 아닐까 하는데 쏠렸다. 


다행히, 옆집에 세입자가 들고 나고를 서너 차례 반복할 무렵 집을 판다는 표지판이 세워졌다. 한창 부동산 경기가 좋을 때라 금방 팔려나갔다.


누군지도 모르는 낯선 남성이 한밤중에 욕설을 하며 문을 열라고 난리를 치는 광경을 온몸으로 맞아야 했던 S 가족만큼은 아니겠지만, 나 또한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이 남성을 이제 보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다행이다 싶었다.




나쁜 이웃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다행이죠?


커버 이미지: Photo by David Clode on Unsplash


이전 06화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이웃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