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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Jun 06. 2024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이웃

"칼슘 수치가 떨어졌다고 하던데, 이것 말고도 또 이상 증세가 나타나면 연락드리죠."


편지 말미에 내가 강조하며 쓴 글이다.


자칫 지리한 싸움이 될 뻔했는데 다행히 이 편지를 끝으로 L은 연락을 중단했다. 그것도 두 번째 편지 만에 말이다. 더 연락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기긴 했으나, L 쪽에서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한 나도 계속 시도할 의도는 없었다.


물론, 한 아파트에서도 옆집에 사는 사람이니 그 후로도 오다가다 엘리베이터에서 주차장에서 아파트 입구 로비에서도 마주치곤 했다. 서로 떨떠름한 표정이긴 했어도 눈인사 정도는 나누었다. 


십여 년 전의 일이다.


습관처럼 거실에 매트를 깔아놓고 요가를 하며 하루를 마무리하고는 침실로 돌아와 막 불을 끄고 누웠을 때다. 


누군가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같은 아파트에 아들 또래의 자녀를 둔 친구가 여럿 있어서 아이의 도시락이나 학교 준비물로 급하게 필요한 게 있다 싶으면 서로 얻어가곤 하던 시절이다. 그런데, 그런 행위는 대부분 밤 9시를 넘기지 않았고 이 또한 휴대폰 문자로 미리 양해를 구한 뒤였다. 


아무도 연락한 적 없고 찾아온 적 없는 시간인 밤 10시에 누가 문을 두드릴까, 덜컥 겁부터 났다. 마침, 남편은 출장 중이라, 한밤중에 갑자기 문 두드리는 사람을 혼자 맞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일단은 못 들은 척하고 누워있었다. 몇 번 두드리다 응답이 없으면 주인이 집을 비웠거나 잠들었으리라 여기겠지 싶어서. 문 두드리는 소리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나중에는 벨 소리로 이어졌다. 아파트 1층 공동 현관에서 눌러야 하는 벨이다.  


이쯤 되니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공포와 혼란에 사로잡혔다. 도대체 누가 무슨 일로 이토록 끈질기게 문을 열라고 요구하는 건지. 감시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는 것조차 두려워 시도하지 못하는 나에게. 


아무리 겁 많은 사람이라도 이런 지경에 이르면 마음을 다잡고 무슨 일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여전히 용기를 내지 못하고 누워 있는데, 새벽 5시까지 자다 깨다를 반복한 것 같다. 문 두드리는 이는 말할 것도 없고, 이를 무시하고 버티는 나까지 고집하나는 끝내주는 셈이다.


그동안 밖에서는 문 두드리기와 벨 누르기, 대문을 손으로 긁기 등 온갖 수단을 써가며 나를 괴롭혔다.  



"아내가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요?"


아들을 등교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L을 만났다.


새벽까지 나를 괴롭힌 장본인은 바로 옆집에 사는 남자였다. 


욕실과 접한 안방의 모서리에 물이 새길래 기술자를 불러 욕실 벽면까지 뚫어 조사했더니 내부 시설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우리 집과 L의 집 구조가 데칼코마니처럼 좌우가 똑같기에, 왼쪽에 있는 L의 집 욕실과 오른쪽 우리 집 욕실이 붙어 있으니 우리 집 욕실에서 물이 새서 L의 집으로 넘친 걸로 기술자가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L은 전날 밤 자신이 벌인 일은 우리 집과 대화를 시도하는 과정이라고 해명했다. 내가 문을 열어줬으면 간단히 끝났을 일 아니나며 오히려 반문했다.


트럭 운전사로 야간에 근무하는 날이 많아 평소에 시간을 내기 힘들다는 L의 변명은 궁색하기 그지없었다. 당장 만나기 힘들다 싶으면 쪽지에 내용을 적어 문 밑으로 밀어 넣었어도 될 일을 말이다. 우리 집 욕실에서 물이 새어 옆집으로 넘쳤다는 것도 밝혀진 사실이 아니라 옆집 욕실을 조사한 기술자의 추측일 뿐이었다. 


설령, 우리 집에서 벌어진 문제라 하더라도 한밤중에 남의 집 문을 두드리며 항의할 정도로 우리의 과실로 몰고 갈 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내가 뭐라고 하든 L은 자기 사정만 쉴 새 없이 계속 떠들어댈 뿐이었다. 



"아내는 출산하러 가는데 물은 자꾸 새고 답답한 마음에 찾아왔더니 아무도 대답은 안 하고..."


기가 찼다.


밤 10시에 뜬금없이 나타나놓고 문을 열어주지 않은 걸 탓하다니. 물 새는 일로 스트레스받는 임산부 걱정은 하면서 밤새도록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도 못 자고 괴로워 한 사람은 무시해도 된단 말인가? 옆집에 물이 새도록 우리가 문제를 일으킨 것도 아닌데.


“당신 때문에 밤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 내 생애 최악의 밤을 보냈다고요. 너무 시달려서 이제 살짝 문 두드리는 소리만 나도 깜짝 놀랄 정도라고요.”


밤 10시에서 새벽 5시라는 말을 특히 강조했다. 이건 L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도 담은 내용이다. 그가 문 두드린 날짜와 시간까지 내가 기억하고 있으며 아파트 복도에 설치된 CCTV에도 찍혔을 그의 행위를 내버려 두지만은 않겠다는 뜻에서다.


물론, 이걸 구두로 전할 때만 해도 L은 내 말은 끝까지 듣지도 않고 자기 입장만 설파했다. 


무턱대고 저지르는 그의 행동과 어투에 비해 L이 요구하는 사항은 그다지 부담되는 건 아니었다.


옷장 바닥이 물에 젖어 상했으니 이것만 교체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이번 문제의 책임 여부를 떠나 그의 아내가 겪었을 심적 부담을 고려해서라도 내가 보태고 싶은 금액이었다. 하지만, 이 남자의 태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밤중에 무리하게 문을 두드린 행위는 반성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기 말만 내뱉고 있으니. 심지어, 그의 아내에 대해 측은지심을 가지며 망가진 가구를 보상해 줄 의향이 있다고 말하려 해도 이 남자는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타인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일방적으로 자기 의견만 내세우는 사람은 동서고금 다 똑같은지, 이 남자도 결국 '법대로 하겠다'로 나왔다.


우리 집도 물이 새는 현상을 잠시나마 겪었으니 어쩌면 L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앞서긴 했지만, 이 남자와 대화를 이어가는 건 불가능이다 싶어 나는 돌아섰다. 


이런 언짢은 대화가 있은 지 4개월이 될 무렵 L에게서 편지가 왔다. 바로 옆집에 살면서 봉투에 우표를 붙이고 소인까지 찍은 상태였다. 이웃과의 분쟁을 소송으로 해결하기 전 거쳐야 하는 과정임을 법률가로부터 들었겠지.


우리 집 욕실에서 물이 새는 바람에 자기 집 안방까지 넘쳐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입었으니, 우리더러 보상하라는 내용이었다. 4개월 전에는 옷장 바닥만 교체하면 된다고 하더니, 이 편지에는 옷장 세트 전체를 교체해야 한다고 나왔다. 이전에 제시한 가격 보다 7배가량 뛰었다.


기한 내에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옷장에다 소송 비용까지 더해 보상해야 한다는 협박으로 끝을 맺었다.


L의 편지를 받기 전, 나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와 보험사에 연락하여 L의 피해를 보상해 줄 방안이 있는지 문의했다. 따지고 보면,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건축물이요 거주자에게 명백한 과실이 없는 일이니 아파트 측에서 보상할 일일 수도 있고, 보험사도 관여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그러던 중 우연히 알게 무료 법률 상담을 통해, L이 겪은 건 아파트 내부 시설에서 발생한 문제이지, 이웃 사람이 고의로 저지른 문제가 아니라는 어쩌면 당연한 듯한 결론을 들었다. 즉, 우리가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는 바람에 옆집으로 물이 샌 것이 아닌 이상 우리가 책임질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와 보험사, 법률 상담을 통해 들은 내용 모두를 L에게 전해주었다. L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겠으나 그래서 편지를 보내기까지 4개월이나 걸렸겠지만, 이건 자신의 일방적 행동과 판단으로 진행된 결과이지 않은가. 내게는 상당히 고통스러운 4개월이었다. 


우리가 법적으로 책임질 일이 아니라는 결론에도 불구하고 L은 손해 배상을 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고 나는 이에 맞서 그동안 겪었던 일을 날짜 순으로 정리해 보내고, 두 번째 편지에서는 이 글의 첫머리에 나오는 문구처럼 내가 겪은 피해까지 적어 보냈다.


이 즈음 건강에 이상이 있다 싶어 병원에 들러 검사를 받았더니 칼슘 수치가 저하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늘 건강을 자신하던 내 입장에선 상당히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그동안 마음 고생했던 순간마저 한꺼번에 떠올랐다. 단순히, 하룻밤 사이에 잠을 설친 정도가 아니었으니. 


L과의 일이 있은 후 문 두드리는 소리만 나면 나는 아무 이유도 없이 가슴이 뛰고 놀라는 증세를 겪었다. 다행히,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은 이제 까마득한 옛 일이 되어 그 시절을 덤덤히 회상하지만, 당시만 해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어쩌면 편지로 끝낼 일이 아니라 전문의 검진까지 받아 내 증세와 피해 내역을 증거로 남겨야 했을지 모를 일이다. 어떤 식으로든 L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추궁할 필요도 있었으리라. 당시, 그런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임산부인 그의 아내가 겪었을 정신적 고충에 마음이 약해졌을 뿐이다.


어쨌든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이웃이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David Clod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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