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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May 30. 2024

영국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는 흔한 오해

- 예전 글을 새롭게 다듬어 올립니다 -


"XX아, 저 위에 있는 니 친구, 원정출산하러 영국 간 거 아니야ㅋㅋ?"


싸이월드가 한창 인기를 끌 무렵, 내 친구의 홈피에 A가 남긴 글이다. 여기서 '니 친구'는 나를 가리키는 말이다.


당시, 내가 출산한 지 얼마 안 될 무렵이라 연락이 닿는 사람마다 '영국에서 잘 살고 있나?'에 이어 '아들은 잘 크고 있나?'라고 전하곤 했다. 그러니, 어디를 들러도 나의 소재지와 근황이 주변에 드러나고 말았다.  


친구와 내가 주고받는 대화 밑에다 A가 이렇게 적어놓은 셈인데,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나를 가리키며 하는 말이라 당황스러웠다. 한국인이 영국에 살면서 출산한 일이 왜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그 당사자도 볼 수 있는 공간에다 조롱 섞인 메시지까지 남겼다니 유쾌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처음 영국에 올 때만 해도 남편과 나는 혼인 신고만 한 부부였고 임신 계획은 없었다. 남편이 목표로 하던 학업이 끝난 후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와 가정을 꾸린다는 막연한 계획만 세웠을 뿐이다. 물론, 사람의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기만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원정출산이라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목표로 영국에 올 만한 배경은 전혀 아니었다. 


무엇보다, 


해외 출산 = 자녀의 해외 국적 취득


이라는 공식이 무조건 성립한다고 오해하는 이를 접하면, 특히 A처럼 나와 무관한 사이임에도 무턱대고 빈정거리는 이를 만나면 피곤하다. 이에 한술 더 떠서 '아들 군대 안 보내려 영국에 가셨나 봐요.'라고 나오는 사람도 있다. 해외 거주자에 대해 막연하게 부정적 인식을 가지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은데, 이들의 오해를 일일이 풀어줄 여유가 없었다. 


속지주의 국가인 미국이라 해도, 오로지 자녀의 해외 국적 취득만을 목적으로 미국행을 감행했다가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하물며, 미국과 비교해 법률과 제도가 다른 영국이지 않은가. 누구나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영국 국적이 주어지지 않는다. 속인주의 원칙에 따라, 출생한 아이는 부모의 국적을 따르게 하기 때문이다. 



"신사의 나라라고 하더니, 진짜 신사들이 다니네."


함께 공원을 산책하던 중 친정 엄마가 하신 말씀이다. 


영국에 잠시 머무는 동안 엄마는 주변을 돌아다니며 눈에 들어오는 것마다 신기해하셨다. 매번 어린아이처럼 호기심을 가지고 쳐다보고 자신의 의견도 말하고 내게 질문도 하셨다. 엄마의 지나친 호기심이 불편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주변 사람이 우리 말을 못 알아들으니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엄마가 '신사'라 칭했던 사람은, 사실, 영국인은 아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의 전통 복장을 한 유태인이었다. 집 근처에 유태인이 모여 사는 동네가 있어서, 장을 보러 가더라도 또 산책을 가다가도 이들과 마주치곤 했다. 


당시 유태인이 착용했던 검정 모자와 검정 옷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옛 영국 귀족의 옷차림과 닮았다 할 수 있다. 영어를 못하는 엄마를 위해 나는 주변에 보이는 사물과 상황을 찬찬히 설명해드리곤 했지만, 이들 유태인에 대해서만은 설명을 생략했다. 우리와 생김새만 다를 뿐 동등하게 숨을 쉬고 감정을 지닌 사람마저 진귀한 사물을 볼 때와 같은 호기심으로 대하는 엄마의 반응이 두려워서다. 자칫 이들의 눈에 무례하게 보이지 않겠는가.


어쨌건, 신사의 나라에서 딸이 살고 있구나,라고 엄마가 믿도록 내버려 두는 편도 나쁘지 않다 판단했다. 



엄마가 영국 신사라 오해했던 유태인 말고, 영국 신사가 정말 있을까?


영국 신사 = 신사다운 옷차림을 하고 신사처럼 행동하는 영국인


이라고 정의한다면, 그리고 철저히 내 주관적 견해만으로 판단한다면, 분명 영국 신사는 있다. 영화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에 나오는 인물을 예로 들어보자. 


- 아버지의 죽음 이후 방황하며 살아가는 태런 에저튼 

- 태런 에저튼이 함께 어울려 다니는 동네 양아치

- 양아치로 살아가는 태런 에저튼을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로 타이르는 콜린 퍼스

- 콜린 퍼스의 도움으로 양아치에서 킹스맨으로 점차 변모해 가는 태런 에저튼


동네 양아치를 응징하고자 우산에 숨겨진 비밀 병기를 휘두르는 모습과 총기를 난사하는 악당의 모습은 영국의 현실과 거리가 멀다. 이런 영화적 요소를 제외한다면, 위에서 나열한 사람 모두가 영국에서 볼 수 있는 인물이다. 즉, 양아치도 있고 신사도 있으며 양아치에서 신사로 혹은 그 반대로 변모하는 이도 있고 이들의 변모에 일조하는 이도 있다. 


영국 신사가 정말 존재한다면 굳이 왜 영국에 대한 오해라고 이 자리에 소개했냐고? 양아치와 신사까지 다양한 인간군상을 만나는 건 비단 영국이 아니라도 가능한 일이지 않겠냐 반문하기 위해서다. 


현실에서 내가 영국 신사를 만나는 곳은 주로 혼잡한 대도시의 거리나 대중교통 속에서다. 


무거운 짐을 들고 혹은 유모차를 끌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 갑자기 나타나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이가 있다. 간혹, 이들의 친절이 과도하다 싶을 때도 있다. 런던 지하철을 제법 이용했지만 매번 목적지가 다르다 보니, 나는 노선표를 천천히 보면서 갈 곳을 결정하곤 했다. 특히, 유모차를 동반한 경우 엘리베이터를 갖춘 역을 중심으로 이동해야 하니 더욱 노선표가 필요했다. 이런 내 사정도 모르고 무턱대고 돕겠다 나오는 이가 있으니 부담스럽기도 했다.


운전 중에도 신사를 만난다.


운전에 익숙하지 않던 시절, 신호 대기 중 시동을 계속 꺼뜨리는 바람에 차를 출발시키지 못할 때가 있었다. 내 뒤로 차가 줄줄이 늘어서고 신호가 두어 차례나 바뀔 때까지 아무도 오도 가도 못하게 만들었다. 모두가 그렇다 할 수는 없지만, 이런 불편한 상황에도 짜증 내지 않고 묵묵히 기다려주는 운전자가 많았다. 


이보다 더 놀라운 광경은 비 오는 날 도로에서 펼쳐진다. 


흙탕물이 고인 도로에서는 어떤 차라도 주행 도중 물을 튀길 수밖에 없다 여기다가 영국에 와서 깜짝 놀랐다. 상당수의 운전자가 행인에게 물을 튀기지 않도록 감속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순수한 신사적 면모에서 나왔다 볼 수는 없다. 운전 중 행인에게 물을 튀기면 100파운드 범칙금과 3점 벌점이 주어진다는 사실은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어쩌면, 지금껏 목격한 영국인의 신사적 행위는 이런 강력한 법규가 낳은 결과물일지 모르지만, 법규 여부를 떠나 언제든 친절을 베푸는 사람은 있으니, 강요에 의해서든 아니든 신사의 면모라 판단하기로 했다.


영국에서 볼 수 있는 신사와 양아치가 별개의 인물일 수 있지만,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 영화 대사처럼 신사는 태어나는 존재가 아닌 만들어지는 존재가 아닐까? 또한 평소에는 신사다운 면모를 보이다가도 잠시 매너를 상실하면서 양아치로 돌변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이를 증명할 만한 곳으로 나는 영국의 경마장을 꼽고 싶다. 신사다운 용모를 갖춘 사람들로 붐비는 공간임에도 비신사적인 행동을 볼 수 있어서다. 주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것이니 나와 다른 견해를 가졌다면 양해해 주기 바란다.



                                                  news.sky.com.........PA Wire/PA Images


↑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경마대회로 영국의 왕실도 참석하는 로열 아스코트 (Royal Ascot) 현장이다. 


일반인도 관객으로 참석할 수 있지만 까다로운 드레스 코드 때문에 다들 신사, 숙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진정한 영국 신사의 자태라 할 수 있지만, 열띤 대회를 지켜보며 술을 마시다 보니 행사 막바지에 취객들이 난동을 벌이거나 바닥에 쓰러져 추태를 부리기는 광경이 매번 펼쳐진다. 


300여 년의 전통을 간직한 대회인 만큼 엄격한 드레스 코드를 유지하는 규정 못지않게 음주 행위에 대한 규정도 강화시켰으면 한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sl wong on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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