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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May 16. 2024

해외에서 인맥 쌓을 때 이런 행동은 곤란해요

"배탈이 나셨다고 해서 이걸 가져왔어요."


상현의 손에 든 비닐봉지에는 생수병이 여럿 들어 있었다.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유학생들끼리 모여 식사도 하고 영국을 잠시 방문한 고국의 대학교 교수와 인사도 나누는 자리였다. 마침 교수의 아내가 물갈이로 배탈이 났다고 해서 상현이 생수를 사 왔다고 한다. 


해외에서 만난 고국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행동으로 간주할 수 있지만, 평소 상현의 태도를 아는 나로서는 눈살이 찌푸려졌다


상현 입장에서는 교수 사모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음을 드러내려는 의도겠지만 물병을 건네며 어찌나 비굴한 미소를 짓는지.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비싼 브랜드의 생수까지 대령하고 말이다. 


저 미소와 표정, 얼마 전에도 보았지.


누군가 집들이를 하는 자리였다. 


우리가 정착한 지역 자체가 소규모이기도 하지만, 그 속에 형성되는 한인 사회는 한 다리 건너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협소해서, 싫든 좋든 같은 공간에서 마주치는 일이 허다했다.


이런 자리에 상현이 예상치 못한 인물이 뒤늦게 나타났다. 


학생들만 모이겠거니 했는데 현지 대학교에 재직 중인 한인 교수도 초대된 것이다. 나이 지긋한 낯선 신사가 들어서자 그의 존재를 궁금해하는 상현에게 주변에서 'XXX 교수님 오셨네', 'OOO 대학교에 계신 분이야'라는 말로 귀띔을 했다. 그러자, 그전까지만 해도 집들이를 마련한 주인장과 주변 친구에게 향하던 상현의 눈과 귀가 일제히 이 교수에게 쏠렸다. 


그때 봤던 상현의 눈빛이 생수를 건넬 때 보인 것과 흡사했다.


해외 유학이라는 막연하고 두려운 프로젝트를 진행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동안 자신이 쏟아부은 열정을 보상받을 날을 고대하리라. 


영국을 방문한 한국의 대학교 교수와 영국의 대학교에 재직 중인 한인 교수, 그것도 같은 전공과목... 상현이 선망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요 어쩌면 상현의 꿈을 실현하는데 디딤돌이 되어줄 인물일 수도 있다. 이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를 쓰는 건 당연한 일이리라. 


문제는, 해외에 거주하는 사람 중에는 상현과 마찬가지로 교수라는 직함을 선망하다 보니 이런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을 지나친 경외심으로 대한다는 점이다. 반면,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안 된다 싶은 사람은 멸시하는 성향을 보인다. 



"네... 뭐... 나중에... 시간 되면..."


상현이 자주 하던 말이다. 


끝말이 애매해서 사실 정확한 어휘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겠다는 건지, 안 하겠다는 건지 명확하지 않은데, 결과만 놓고 따져보면 주변 사람의 부탁을 에둘러 거절하기 위한 표현이었다 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은 아니고, 우리 부부처럼 교수 직종에 종사하지 않는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만 말이다. 


"공항까지 가는데 차 좀 태워줄 수 있어?"

"열쇠랑 휴대폰까지 책상에 놔두고 나오는 바람에 사무실에 못 들어가는데, 내 방돌이한테 연락 좀 해줄래?"

"내일 재성이 기숙사 옮긴다는데 짐 날라주러 같이 갈까?"

"급한 일이 생겨 그러는데 다음 주에 선배들 오면 나 대신 이 사람들 주변 구경 좀 시켜줄 수 있나?"


유학생들 사이에 흔하게 오가는 대화요 서로 품앗이하듯 도와주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부탁만 하면 상현은 늘 앞서와 같은 애매한 답변을 내놓으며 사람 속을 태웠다. 당장 전화 한 통만 해도 가능한 일마저 '네... 뭐... 시간 되면...'으로 대꾸를 하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정작, 자신은 주변 사람으로부터 도움 받기를 당연시하며 말이다. 어디 그뿐이랴. 그가 유학을 오는 과정에서부터 영국에 정착하기까지 우리 부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도와준 일도 있지 않은가.


내 아들의 돌잔치에 나타나서는 돌쟁이가 가지고 놀기에는 위험하다 싶을 정도의 작은 부품으로 구성된 플라스틱 배를 선물한 사람이다. 손가락으로 살짝 누르기만 해도 금방 해체될 정도의 조잡한 장난감이었다. 교수 사모에게 건넨 물병 하나 값도 못 미칠 영국판 '천냥 마트' 제품급으로 말이다.


상현에게 향하던 여러 감정과 과거 경험을 이렇게 적고 보니 나도 참 옹졸한 사람 같다. 


옹졸함에 대한 변명이라고 하면... 


아들의 돌잔치와 누군가의 집들이, 생수 선물까지 모두 개월 사이순차적으로 벌어졌고, 애매한 말로 주변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는 일마저 수시로 이어지다 보니 상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뿌리 깊게 박히고 말아서다.



"상현씨가 합격이라도 하면 그 학교 사람들에게 죄짓는 기분 안 들겠어요? 다들 당신 선후배인데?"


고국으로 돌아간 상현이 구직 활동을 벌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우연히 연락된 상현으로부터 XXX 대학교를 지원한다는 말을 들은 남편은 '그 학교에 아는 선배가 있는데...'로 이야기를 시작한 모양이다. 자신을 추천인 명단에 포함시키추후에 인사담당자에게 말해주겠다고 했단다.


이게 무슨 X소린가 싶어 내가 크게 외쳤다. '미쳤어요?'


나의 격한 반응에 놀라서인지 남편은 상현의 실력을 언급하며 어설프게나마 그를 옹호하려 들었다. 더 갑갑해진 내가 찬찬히 설명을 이어갔다. 인사담당자가 채용 후보의 실력을 물어보려 같은 학교 출신에게 연락하겠냐고 말이다. 그건 담당 교수에게 물어보거나 후보가 제출한 서류 검토만으로 충분하지 않냐고.


한때 같이 공부했던 사람들 모두가 잘 되기를 바라는 남편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나 또한, 아무리 이기적이고 안하무인의 태도로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 이라도 그의 구직 활동을 방해할 마음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인사담당자가 물어올 상현의 인성에 대한 질문에 '허위 정보'를 제공해서는 안 됨을 강조했다. 그 한 사람 돕겠다고 나섰다가 그로 인해 피해 볼 수백 명의 학생과 동료를 생각해야지. 상현과 근무하게 될 사람 중에는 남편의 학창 시절 선후배도 포함되어 있다. '선후배'라는 말이 튀어나오니 그제야 남편이 정신을 차리는 듯했다.


상현이 직접 연락하지 않더라도 그의 구직 소식은 자연스럽게 남편 귀로 흘러들어올 수밖에 없다. 


인사담당자가 후보에 관한 정보를 검색하는 과정에서 동문수학했던 사람에게 연락하기 때문이다. 바로, 남편 같은 사람이다. 


이런 점을 상현은 간과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을 뽑아줄 교수의 눈에만 잘 들면 그만이다 싶었겠지만, 실상 그런 교수가 채용 과정에 연락하는 제삼자도 있지 않은가. 해당 후보와 같은 시기, 같은 학교에서 공부하며 장시간 옆에서 관찰했던 사람만큼 당사자를 잘 아는 사람이 있겠나. 


어디 남편만 그런 입장이겠나. 당시만 해도 교수가 아니라는 이유로 상현에게 멸시를 받아야 했던 사람들 모두 그의 이기적인 처세에 당황하고 말았다. 지금은 교수로, 연구원으로 세계 각지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향후 자신의 취업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줄만한 사람을 일일이 쫓아다니며 인맥을 쌓으라는 말은 아니다. 해외에 거주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골고루 인심을 후하게 써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돌잔치에 값비싼 선물을 들고 나타날 필요도 없다. 


이기적이고 안하무인의 태도로 주변 사람에게 미움을 사는 일만은 꼭 피하자!


* 글에 언급된 이름은 모두 가명이며, 소개된 일화도 약간씩 각색되었습니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fauxels on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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