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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May 02. 2024

아들이 쓰레기통 관리를 하고부터 달라진 풍경

"종이 상자는 이렇게 접어서 파란 쓰레기통에 넣고요, 아니 초록색 말고요!"


아들의 목소리가 크게 들리길래 밖을 내다봤더니, 두 부자가 쓰레기통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둘의 실랑이가 아닌 아들의 일장 연설이었다.


낮잠에서 막 깨어난 남편더러 쓰레기 처리 좀 거들라고 등을 떠밀었는데, 딱히 도움이 필요해서라기보다는 밖에 나가 바람 좀 쐬고 잠을 깨라는 의미에서다. 


한편,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쓰레기 처리 작업에 강제 투입된 남편은 자신이 할 일이 아님에도 얼떨결에 따라나섰다가 면박을 당했으니 억울할 만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은 우리 집에서 쓰레기 분리 실적이 제일 저조한 사람이다. 한국의 엄격한 쓰레기 종량제와 분리수거 문화를 경험했음에도 그렇다. 아마도 영국에 오래 살면서 쓰레기 배출 개념이 느슨해진 탓이 아닐까 싶다.


누구든 영국에 처음 오기만 하면 느슨한 쓰레기 수거 방침에 놀라기 마련이다. 


상점에서 사용하는 일회용 봉투가 유료화된 것도 2015년에 이르러서다. 쓰레기를 분리 수거한다고는 해도 과자 봉지와 상품 포장지, 비닐봉지, 일회용기까지 대부분 일반 쓰레기로 취급하므로 영국에서 재활용 쓰레기의 범위는 좁다. 쓰레기 종량제도 없다. 그러니 일부 금지 품목을 제외하고 무엇이든 일반 쓰레기통에 다 집어넣는 경우가 허다하다.


음식물 쓰레기를 별도로 수거하는 지역도 있지만, 아직은 내가 사는 동네처럼 일반 쓰레기로 취급하는 곳이 더 많은 실정이다. 쓰레기통은 지역마다 동일하게 지급되는 바퀴 달린 형태라, 어린아이도 직접 밀어서 이동시킬 수 있다. 이 정도면 초등학생에게 맡겨도 가능한 일이지 않겠는가.


아무리 쓰레기 배출 규정이 느슨하다 해도 그렇지, 다 큰 성인이 쓰레기 처리가 서툴러 아들에게 훈계를 받다니 말이 되나 싶은데, 우리 집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아들이 쓰레기 처리를 맡고부터 남편과 나 모두 이 일에 거의 손을 뗐기 때문이다. 


아들이 집안일 하나를 온전히 도맡아 해 주니 고맙긴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행복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


우선, 남편부터 아들의 지적을 귀찮아할 때가 있고, 무엇보다 향후 몇 개월 뒤 자신에게 닥칠 일을 걱정하고 있어서다.


곧 대학에 입학할 예정인 아들이 집을 떠나면 누군가 대신 쓰레기 처리를 해야 하지 않겠나. 아들이 거의 10년가량 해오던 일을 말이다.


남편은 직감적으로 이 일을 자기가 떠맡으리라는 걸 알고 있다. 안 그래도 분리수거가 서툴다고 초딩에게 핀잔받던 신세인데 그 일을 자신이 대신해야 하다니 걱정부터 앞서겠지. 더군다나, 우리 동네에서는 할 의무가 없음에도, 음식물 쓰레기를 별도로 모으고 또 이를 퇴비로 만드는 작업까지 하고 있으니. 


지금은 사그라들긴 했는데 나 또한 아들의 쓰레기 작업 때문에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다.



"엄마요, 이 쿠폰은 유효기간이 아직 한 달이나 남았는데요. 피자 한 판이 7.99 파운드 밖에 안 해요..."


또 시작이군. 


공부방과 부엌, 두 곳에 놓아둔 재활용 쓰레기통을 아들이 집 밖으로 가져가 그 속에 담긴 종이와 플라스틱, 캔, 유리병을 하나씩 꺼내 반듯하게 접거나 뚜껑을 제거하고 비닐을 떼어 내는 등 추가 작업을 거친 뒤 개별 수거함에 넣는다. 이 과정에서 유효기간이 남은 할인 쿠폰이 발견되면 아들은 꼭 내게 되가져오곤 했다.


개인 정보가 들어간 편지나 고지서의 경우, 보안을 위해 별도로 보관해 두었다가 한꺼번에 문서 세단기에 넣어 처리하는데, 간혹 이런 서류가 재활용통에 잘못 흘러 들어간 걸 걸러내는 역할도 아들이 한다. 문제는, 단순 할인 쿠폰까지 감시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주로 패스트푸드와 배달 전문점에서 보내온 것인데, 평소 배달 음식을 거의 시키지 않으니 내가 이런 할인 쿠폰에 관심을 둘 이유가 없다. 


초딩 아들은 '할인 쿠폰 = 돈 절약'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어쩌면, 이런 쿠폰을 핑계 대고서라도 햄버거와 피자를 실컷 먹을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 한 행동인지도 모른다.





↑ 우리 집 쓰레기 처리 전문가께서 재활용 수거함에 들어갈 품목을 하나하나 점검하는 중이다. 


작은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쿠폰까지 매의 눈으로 가려내고 문서 하단에 깨알 같은 글씨로 적힌 날짜도 찾을 정도로 지나치게 정교한 작업이다. 이 과정에서 유효기간이 남은 할인 쿠폰이 발견되면 왜 안 쓰냐며 내게 되가져와 추궁하곤 했다.


아무리 엉뚱한 발상이라 하더라도 아들이 주장하는 바를 끝까지 들어주는 편이라, 나는 이렇게 할인 쿠폰을 가져올 때마다 진지한 대화를 나누곤 했다. 


할인해 주는 척하면서 정상가와 크게 차이 나지 않는 할인권도 있고... 할인이라는 명목으로 불필요한 소비를 유도하는 상술... 기름진 음식 섭취와 과식 등 몸에 해로운 식습관까지... 내가 아는 선에서 또 초딩이 알아들을 수준으로 설명해 줬다. 


그동안 내가 가족을 위해 크고 작은 이벤트를 다양하게 만들어내고 그 핑계로 외식을 했던 경험을 상기시켜 주고, 할인 쿠폰이 아니더라도 얼마든 음식을 먹을 기회가 많지 않았냐고 반문도 했다. 


이후에도 할인 쿠폰은 계속해서 나타났고 그래서 이에 대한 토론도 이어졌지만, 차츰 그 횟수가 줄어든다 싶더니 결국 사그라들었다. 아들도 지쳤겠지.


얼른 집에 들어가 숙제도 하고 게임도 하고 놀아야 하는데 언제까지 할인 쿠폰 찾기만 할 수는 없지. 엄마 논리대로라면 안 쓸 것이 뻔하지 않은가.  


영국의 변화무쌍한 날씨는 또 어떤가. 단순 쓰레기 처리 작업만으로도 초딩에게는 길고 고된 시간인데, 언제 비가 쏟아질지 바람이 불어 작업하던 쓰레기가 날아갈지 모르니 일찌감치 일을 끝내는 편이 상책이지. 



"당신 땅에서 벌어지는 일이니 나 대신 당신이 직접 시청에 항의해 주시오."


이웃에 사는 A가 한 말이다.


평소에는 집 앞에 보관해 두는 쓰레기통을 쓰레기 수거일이 되면 트럭이 들어서는 골목 입구까지 내놓아야 하는데, 이렇게 해서 비워진 쓰레기통이 간혹 엉뚱한 위치에 가는 경우가 있다.


A의 불평은 이런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우리 집까지 포함해 대략 다섯 호의 집이 같은 입구에다 쓰레기통을 가져다 놓는데, A의 쓰레기통은 매번 엉뚱한 위치로 향한다는 소리다.  


동네마다 동일한 쓰레기통을 쓰지만 집집마다 쓰레기통 뚜껑이나 측면에 집 호수를 적어두거나 번호 스티커를 붙여 두기에, 쓰레기통이 엉뚱한 곳에 가더라도 분실할 염려는 없다. A의 경우, 자신이 놓아둔 위치가 아닌 자기 집 담장에다 누가 쓰레기통을 갖다 놓는 바람에 담장이 망가진다나 뭐라나.


A의 불만과 요구사항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우선, 쓰레기통이 엉뚱한 자리에 놓인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몇십 미터도 아니고 단 몇 미터 떨어진 지점, 그것도 자기 집 앞에 두는 게 뭐가 그리 불만인지?


또한, 쓰레기통을 거칠게 다루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담장 가까이에 붙여둘 뿐인데, 이는 골목으로 들어오는 차량의 진입을 방해하지 않기 위한 배려 아닌가? 그런다고 해서 담장이 얼마나 상하는지?


무엇보다, 불만을 가진 사람이 직접 시청에 항의하면 될 일 아닌가? 그걸 왜 그 집 쓰레기통과 무관한 나한테 요청하라는 건가? 내 땅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내가 나서야 한다고?


"저기요, XX호 집 쓰레기통을 엉뚱한 위치에 계속 가져도 놓으시는데요. 그 때문에 그 집 사람이 저한테 항의하거든요. 그것 좀 시정해 주세요. 담장 옆에 갖다 놓으면 담장이 손상된다고 하니 거기 놓지 마세요."


이런 요청을 하라고?

내가 왜?


A가 주장하는 바는, 쓰레기통을 내놓는 자리가 우리 집 땅에 속하므로 땅 주인이 나서서 항의해야 한다는 소리다.


산책에서 돌아온 우리 부부를 붙들고 시작된 A의 밑도 끝도 없는 주장에 나는 질려버렸고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도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않았다. 그 후로 A가 보이더라도 애써 외면하며 다녔더니 다행히 쓰레기통에 대한 불평은 다시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이 걱정되었다. 


쓰레기 수거일에 맞춰 골목 입구에 쓰레기통을 가져다 놓고, 비워진 쓰레기통을 찾으러 가는 아들에게 A가 트집을 부리면 어쩌나 싶어서다.



"너 XX호 아저씨 안 무서워?"


이렇게 물었더니 아들이 한심하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지 부리는 사람과 마주한다고 자기가 무서워할 것 같냐는 표정이었다. 역시 쓰레기 처리 전문가답다.


아들아 너만 믿는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Pawel Czerwinski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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