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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May 09. 2024

영국의 술집에서 '안젤라'를 찾으면?

"여자 화장실에 특이한 포스터가 있더라."


식당에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러 들어왔지만, 사실 우리가 자리를 차지한 공간은 술집이었다. 영국 전역에 흔하게 볼 수 있는 '펍 (Pub)' 체인점으로 술보다는 식사 메뉴에 더 끌리기도 하고 미성년자도 출입할 수 있어서 아들과 함께 애용하게 되었다. 


내가 화장실에 들렀다 자리로 돌아오면서 시작된 대화다. 화장실 벽면에 걸린 포스터가 눈길을 끌어서다.






술집에서 만난 데이트 상대의 행동이 의심스럽다거나, 술 마시는 도중 곤란을 겪는다 싶을 때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하라는 내용이다. 


도움을 요청할 때 사용하는 암호가 안젤라 (Angela)로, '안젤라 있어요?'라고 물으면 직원이 무슨 일인지 눈치를 채고 손님을 조용히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 주거나 택시를 불러 귀가를 돕는다. 


안젤라를 암호로 쓰는 이유는 2012년에 가정 폭력으로 사망한 안젤라 크럼프턴 (Angela Crompton)이라는 여성을 기리기 위해서다. 어떻게 보면 이 여성과 '안젤라' 범죄 예방 캠페인을 연결 짓기는 힘들어 보이는데, 안젤라라는 이름의 어원이 '신의 사자(使者)' 혹은 '천사'라는 점이 캠페인 취지에 더 들어맞는다 할 수 있다.


영국에서 발생하는 스파이킹 범죄에 관해 내 브런치에서 다룬 적 있다. 타인의 술이나 음료에 몰래 약을 타는 행위가 '스파이킹 (Spiking)'으로, 이를 예방할 수 있도록 음료 잔이나 술병을 가리는 덮개를 제공한다는 정보도 위 포스터에 나온다.



스파이킹이 아니더라도 술집이나 클럽에서 만난 사람을 노리는 범죄는 다른 형태로도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런 범죄의 심각성을 깨달은 영국 경찰이 내놓은 해결책 중 하나가 바로 '안젤라 찾기' 캠페인이다.



Ask for Angela


이 캠페인은 영국의 술집과 클럽, 식당 등 유흥업소에서 근무하는 직원과 경찰의 협력으로 진행된다.


불안해하는 손님이 안전하게 피신하거나 귀가할 수 있도록 돕고, 물의를 일으키는 이를 저지하는 등의 행동 지침을 준수하도록 직원을 교육시킨다. 해당 업소가 이런 안전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리는 포스터를 화장실에 배치한다.


2016년 영국 링컨셔 지역에서 시작된 프로그램이 영국 전역으로 확산된 뒤 타 유럽 도시와 미국, 영연방 국가까지 전파되어 현지 사정에 맞게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실시되고 있다. 다만, 아직까지는 업소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양상이므로 모든 유흥업소에서 기대할 수는 없다.


안젤라 포스터를 내가 최초로 발견한 시점에서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이 글을 쓰겠다 마음먹고 우리 집 남자들과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이들에게서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그 포스터, 남자 화장실에도 있던데."  


그동안 가족 여행과 아들의 입시를 목적으로 몇 차례 타 도시를 방문하면서 동일한 펍 체인점에서 식사를 하고 난 뒤다. 


이전에는 화장실 벽에 뭐가 붙어있는지 관심이 없던 남자들이, 나의 포스터 목격담을 전해 듣고 호기심이 생겼는지 화장실 벽면을 눈여겨보았던 모양이다. 


남자 화장실에도 동일한 포스터가 있다고?

남자가 안젤라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그게 말이 돼?


처음에는 이 남자들이 농담을 하는 건가 싶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여성이 '안젤라 있어요?'를 암호처럼 건네야 하는데 남성도 암호의 의미를 있다는 아닌가.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니 남녀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필요한 조치가 아닐까, 로 방향을 틀었다. 나의 좁은 소견을 탓하며 말이다.


예전에 사진으로 남겨두었던 포스터를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보았더니, 본문 어디에도 성별을 가리키는 말은 없었다. 도움을 요청할 사용하는 암호가 여성 이름이요, 포스터 사람 이미지도 여성일 뿐, 어디에도 피해자와 가해자의 성별을 한정 짓지는 않았다.


사실, 안젤라 찾기 캠페인은 특정 성별의 사람이 아닌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를 위한 프로그램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캠페인 포스터를 남녀 화장실에 모두 부착한다.


캠페인 홍보 영상을 보면 분위기를 더 자세히 파악할 수 있다.



@ Sam Teale Productions



위 영상에도, 여성만을 위한 서비스가 아닌가 걱정하면서도 남성이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좀 더 개방적인 사고를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데이트 강간, 폭력, 꽃뱀, 사기, 동성애 혐오 범죄, 스파이킹까지 남녀노소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이니.



"섄디 두 잔이랑 기네스 하나 달라고 했지요?"


바텐더가 지나치게 큰 목소리로 나를 향해 소리쳤다. 


뭔 소리? 내가 언제 술 시켰다고 그러지...


펍에서 음료를 주문하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낯선 남성이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다. 처음에는 친절히 답변하려 했으나 상대가 술에 취했는지 혀꼬인 발음으로 계속 횡설수설하는 지경이라 내버려 두었다. 뭐라 하는지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계속 대화를 시도하려니 눈살마저 찌푸리게 되었다. 이때 맞은편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바텐더가 나서서 이 남성을 따돌려 준 셈이다. 


안젤라 찾기 캠페인은 비교적 최근에 실시된 프로그램이며, 낯선 남성이 내게 말을 걸었던 시점은 이 캠페인과 무관한 시절이다. 사실, 남성의 행동은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아서 나 혼자도 가볍게 뿌리칠 수 있는 정도라 여겨진다. 서양의 낯선 술집이나 클럽 한편에 혼자 서 있어 본 여성이라면 아마 대부분 경험해 본 일일 테다. 그럼에도, 더 큰 문제로 불거지기 전에 이를 차단하려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 업소 직원의 업무 지침이 아니었다 싶다.


안젤라 캠페인에 참여하지 않는 업소라 하더라도 스파이킹과 데이트 강간 등의 범죄 심각성을 지각하고 있으므로, 자신이 위험에 처해 있다 싶으면 직원과 주변 사람에게 적극 도움을 요청하자.


커버 이미지: knowsleynews.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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